1970년대는 '스탑앤고'…지금은 '스턱' 중앙은행[BOK워치]

'안개' 아니고 물가안정·금융안정에 갇혀
'근원물가' 안 떨어지는 글로벌 공통 미스터리
'물가'보고 전진하기엔 비은행 PF 부실 등 금융불안
물가상승률 2% 밑으로 떨어져야 금리 인하 가능할 수도
중앙은행 역할 한계 봉착…'전진도 후진도 못한다'
  • 등록 2023-04-18 오후 3:30:00

    수정 2023-04-18 오후 4:07:28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자동차를 운전하는데 안개가 가득해요. 그럴 때 어떻게 하겠냐. 차를 세우고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본 다음에 갈지 말지 봐야 하지 않겠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월 기준금리를 동결, 1년 반간 이어졌던 금리 인상기를 마무리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런데 안개가 아니라면 어떨까. 차가 앞뒤로 빽빽하게 서 있어서 전진도, 후진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전 세계 공통적으로 근원물가가 떨어지지 않고 있는데 금리를 큰 폭으로 빠르게 올려버린 탓에 금융불안은 고조되고 있다. 앞에는 금융안정이, 뒤에는 물가안정이 딱 버티고 있어 두 마리 토끼한테 둘러싸인 상황이라면 중앙은행 혼자 힘으로 이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물가안정 목표제가 없었던 1970년대엔 물가를 잡겠다고 금리를 올렸다가 경기가 조금 나빠지니 금리를 다시 인하하는 ‘스탑앤고(Stop and go)’의 함정이 문제였다면 지금의 중앙은행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사이에서 ‘스턱(Stuck)’, 갇혀 버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출처: 통계청


◇ 금리 올렸는데 근원물가 안 떨어진다


한은은 2021년 8월, 주요국 대비 먼저 금리 인상을 시작했다. 1년반간 올렸던 금리 인상 효과는 올 상반기 가장 효과가 클 것으로 예측되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근원물가는 별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소비자 전년동월비 상승률은 작년 7월 6.3%에서 올 3월 4.2%로 떨어졌지만 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근원물가는 같은 기간 3.9%에서 4.0%로 변했다. 작년 11월 4.3%보다는 낮아진 것이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외려 한은은 올해 근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3.0%에서 상향 조정키로 했다.

이 총재는 근원물가 둔화세가 느린 이유에 대해 “소비자 물가는 에너지 가격 하락에 따른 기저효과가 많이 반영돼 떨어지는 반면 근원물가는 작년에 못 올렸던 전기·가스요금 인상분이 2차 파급으로 반영되는 데다 거리두기가 끝난 후 소비가 약간 회복, 서비스 물가 둔화 속도가 느리다”고 밝혔다. 금리를 한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올렸으나 수요측 힘이 여전히 세다는 방증이다. 공공요금 인상 등 원가 부담이 커졌다고 해도 수요가 죽었다면 소비자 가격에 전가할 가능성은 낮다.

높은 근원물가는 전 세계 공통 현상이다. 미국 물가상승률은 작년 7월 9%를 넘었다가 올 3월 5%로 낮아졌으나 근원물가는 작년 10월 6.6%에서 3월 5.6% 수준으로 소폭 둔화하는 데 그쳤다. 향후 1년 기대인플레이션율은 4%중후반대로 반등했다. 금리 인상을 멈춘 캐나다와 호주의 근원물가는 3월 각각 4.7%, 6.9%에 달한다.

우리나라보다 더 먼저 금리를 올렸던 칠레, 브라질, 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역시 근원물가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의 근원물가는 작년 8월이나 올 2월 5%초중반대로 큰 변화가 없었다. 이에 IMF는 전 세계 물가상승률을 올해 7%로 상향 조정하고 2024년에도 4.9%로 높였다. 2025년까지도 물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물가안정까지 인내심 갖자 vs 물가와 싸우지 마라

주요국들이 작년 내내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다 같이 금리 인상에 나섰음에도 근원물가의 높은 흐름이 고착화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상반되는 두 가지 해법이 등장했다.

첫 번째는 중앙은행이 ‘인내심’을 갖고 금리 인상이 물가를 안정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바나 텐레이로 영란은행 통화정책위원은 14일(현지시간) 미 워싱턴에서 열린 IMF 고위급 패널 토론에 참석해 “통화정책이 전달되기 위해선 긴 시차가 있고 대부분의 통화정책이 작년 하반기에 발생해 우리는 아직 초반에 있다”며 “금융불안은 일부분의 문제이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은 관계자는 “1970년대 오일쇼크 때도 물가가 하락할 때 한번에 쭉 하락하기보다 오르고 내림을 반복했다. 대부분 전쟁이 동반될 때 이러한 흐름을 보이는데 당시엔 중동전쟁이, 지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각종 지정학적 리스크가 있다”며 “지금은 물가안정 목표제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신뢰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반면 세계적인 석학인 올리비에 블랑샤르 메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 겸 피터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은 IMF 토론에서 “지금의 인플레는 (공급 충격에 의한) 1차 효과이지, 2차 효과는 거의 없었다”며 “그들(인플레이션)과 열심히 싸우려고 하지 말자. (공급) 충격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주요국 중앙은행


◇ ‘갇혀버렸다’…정책 여력 바닥난 한은


중앙은행이 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한 것은 물가 상승이 공급망 불안, 유가 급등 등 공급 충격에 의한 것에서 출발했을지라도 2차 파급 효과를 차단, 물가 상승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 리오프닝, 산유국들의 감산에 유가 상승 불안은 여전하고 금리 인상에도 경기 충격은 외려 예상보다 덜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절대 금리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다. 한은 기준금리는 연 3.5%로 경기를 갉아먹는 ‘긴축’ 수준에 와 있다. 다만 1월 3.5%로 금리를 인상한 이후 91일물 양도성 예금증서(CD), 국고채 금리 등 장단기 금리 구분 없이 기준금리를 하회하는 일이 잦아졌고 금융당국 압박에 은행 예금·대출 금리는 더 빨리 떨어지고 있다. 금통위원들이 물가를 잡기 위해서 기준금리를 굳이 3.5%로 올려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3.5%로서의 영향이 실제 발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금리를 더 올려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비은행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 우리나라의 가장 약한 고리는 시장금리 하락 등 유동성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 금융불안을 고려해 시장의 기대대로 금리를 내렸다가는 ‘물가목표제’가 폐기처분될 우려도 있다. 또 다른 한은 관계자는 “시장에선 물가상승률이 2%대로 내려가면 금리를 인하할 수 있다고 보지만 물가가 2%대가 되면 목표치에서 균형을 이루는 수준인데 왜 금리를 조정하겠냐”며 “최소한 물가가 2% 밑으로 떨어지고 금리를 내리지 않을 경우 경기가 망가진다고 하면 그때 서야 인하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사실상 정책 여력이 바닥나고 있다. 금리 인상으로 전진을 하려면 비은행 PF 구조조정 등을 통해 부실 위험을 제거해야 하고, 금리 인하를 하려면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을 자극할 지정학적 불안 등 공급 충격을 제거해야 한다. 이는 한은의 몫이 아니다. 다른 중앙은행들도 비슷한 고민이다. ‘갇힌 중앙은행’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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