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전쟁 발발 원인이다. 많은 이들이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즉 나토의 동진(東進)을 이유로 든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가입하고 싶겠지만 프랑스와 독일이 반대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푸틴도, 젤린스키도 아는 사실이다. 전쟁 발발 직전인 2월초 독일의 슐츠 총리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푸틴을 만났던 것도 이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슐츠는 러시아를 방문하기 전 젤린스키를 만나 그런 사정을 얘기했고, 그도 ‘머나먼 꿈(remote dream)’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사실 나토의 동진이나 러시아가 서방에 포위되어 있다는 ‘피포위 심리’ 같은 것은 전쟁의 핑계에 불과하다. 지금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푸틴의 국내 정치용 성과를 만들기 위해 벌인 군사적 도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독재 권력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할 성과가 필요한 법이다. 2014년 크림반도를 차지한 뒤 8년이 지났다. 자신이 ‘위대한 러시아’를 건설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젤린스키 정부가,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이렇게 격렬하게 저항할지는 예상 못했다. 최근 12개의 전쟁을 분석한 스토신저는 전쟁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상대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결론 내렸다. 푸틴도 똑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러시아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도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블린이나 스팅어 같은 무기의 힘이 아니다. 무기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이를 운용하는 우크라이나 군의 결의와 능력이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로 똘똘 뭉친 우크라이나 국민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국민이 함께 싸우는 ‘인민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인민전쟁에서 승리한 강대국은 없다.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실패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에서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이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1950년 이후 전쟁을 보면 55대 45로 약자가 이긴 적이 더 많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뒤에는 서방의 무기 지원과 정보 제공이 있지 않은가.
전쟁의 결과는 군사적 승패와 무관하게 러시아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전쟁은 군사적 승리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정치적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푸틴의 정치적 목표가 나토의 동진을 막는 것이었다면, 핀란드와 스웨덴의 중립화 포기로 이미 실패했다. 우크라이나를 친러 국가로 만드는 일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는 어떤가. 필자는 이번 전쟁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겠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가 명실상부한 ‘국민국가’(nation-state)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이 다소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게 침공의 빌미로 작용했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하나의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완전히 구별되는 우크라이나로 거듭나게 된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말 그대로 값진 희생으로 승화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