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이날 기부금 약정식 기념사에서 “젊어서 목숨 걸고 태평양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수출 전선에 뛰어들어 많은 경험을 했다”며 “우리 국민이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잘 교육하고 화합하면 세계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일”
기부는 묵직했지만, 반응은 담담했다. 그간 그가 보인 인재 우선론적인 행적에 비춰 보면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51년 동원그룹 사사(社史)에서 ‘사람’은 언제나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이런 그의 신념은 사람을 손수 뽑아온 데에서 읽을 수 있다. 공채 면접장에는 늘 그의 자리가 있었다. 1984년 첫 공채를 시작하고 2019년 4월 회장직에서 물러나기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기업 총수가 말단 직원 채용까지 관여하는가 싶지만, 거꾸로 회사를 이끌어갈 직원을 뽑는데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장남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회장이 매년 신입사원 공채 면접을 직접 챙기는 것도 유전이다.
한국금융지주 탄생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인재 우선론이 있다. 1981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하던 당시 졸업생들이 증권사에 몰리는 걸 보고서 마음을 굳혔다. “한국에서도 인재들이 증권업으로 몰리겠구나.” 이듬해 귀국하고서 한신증권을 인수했다. 우려하는 이가 많았다. 자본금 20억원의 동원산업이 71억원을 주고 한신증권을 산다고 하니 무리라고 했다. 증권업 저변도 닦이지 않은 척박한 환경이기도 했다. 금융보다 제조가 우선인 시대였다. 인재를 끌어오려면 증권업이 필요하다는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우려가 무색하게 한신증권은 성장을 거듭했다. 동원증권을 거쳐 현재의 한국금융지주로까지 성장했다. 투자, 운용, 은행, 여신, 부동산을 망라하는 자산 73조원의 국내 수위 금융지주다.
1979년 만든 ‘동원육영재단’에서도 그의 사람 씀씀이를 짐작할 수 있다. 1969년 동원산업을 설립하고서 개인 자격으로 고학생을 후원해왔는데 한계가 있었다. 체계를 잡아 장학 사업을 하기로 하고 사재 3억원을 들여 재단을 만들었다. 물가상승 배수를 적용한 현재 가치로 치면 18억원 규모이다. 여태까지 재단의 지원을 받은 중고교·대학생은 8000명이 넘는다. 올해까지 재단이 기부금으로 쓴 누적금액은 420억원이다. 최용원 펜실베이니아 의과대 석좌교수, 김영섭 부경대 총장, 방하남 전 노동부 장관 등이 재단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까지 올랐다.
|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40여 년간 이어져온 교육 프로그램이 ‘동원 목요세미나’다. 직원 함양 차원에서 1974년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한다. 팀별로 주제 발표를 하고 생각을 공유한다. 직무와 관련 없어도 무방하다. 평소 임직원에게 ‘문사철 600’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학 300권, 역사 200권, 철학 100권을 읽으면 “정신적 풍요(문학)와 지혜(역사), 통찰력(철학)을 기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업계에서 동원 출신이 한 자리씩 하는 것은 인재 사관학교의 결실이다. 황종현 SPC삼립 사장과 문종석 CJ프레시웨이 고문(전 대표)은 직전까지 동원그룹에서 수완을 닦은 ‘김재철 키즈’로 분류된다. 김 명예회장의 설득 끝에 1982년 동원증권 창립 멤버로 합류한 고 김정태 씨는 훗날 통합 초대 국민은행장(2001~2004년)을 지냈다.
자녀를 경영자로 키우는 데에는 엄격했다. 한국투자금융지주를 맡은 장남 김남구 회장은 1986년 4개월 동안 동원산업의 명태 잡이 배를 탔고, 차남 김남정 동원그룹 부회장도 입사하고 처음 맡은 보직이 참치통조림 공장 생산직이었다. 김 명예회장의 심지에 따른 것이었다. “경영자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