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 연작 뒤로하고…'먹선 한 줄'로 되돌아간 젊은 내공

갤러리조은서 개인전 '정체성' 연 성연화
조각한지그림 '흐름' 연작 대신
여백 돋보이는 '정체성' 전면에
선에 대한 두려움 극복한 작업
"매일 오늘 나 남기듯 그어낸다"
  • 등록 2025-01-02 오후 12:35:01

    수정 2025-01-03 오전 7:44:28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세상에 없던 화면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조각한지그림’. 푸름이면 푸름, 초록이면 초록. 가장 진한 바닥에서 시작해 그 색이 흔적을 다할 때쯤 마무리됐다. 수제한지를 한 줄 한 줄, 한 토막 한 토막 잘라내 캔버스에 붙여낸 그 작업이 말이다.

작가 성연화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에서 연 개인전 ‘정체성’에 건 자신의 작품들 사이에 앉았다. 앞쪽 벽면에 ‘정체성(Identity) 24-000-001’(2024·53×45.5㎝·왼쪽)이, 뒤쪽 벽면엔 ‘흐름(Flow) 24-003-006’(2024·193×130.3㎝)이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실 그냥 ‘수제한지’로 퉁치기엔 섭섭하다. 지난한 과정이 하나도 안 보이니까. 길죽하게 잘라낸 한지에 물풀을 녹여 바르고, 돌을 문질러 질감을 내고, 커피가루 녹여낸 안료로 톤을 잡고, 아크릴물감을 두세 번 칠해 색을 얹고, 파라핀으로 덮어낸 뒤에는 화룡점정으로 사방을 태워 은은한 불자국을 입히는 그 과정 말이다.

물론 여기가 끝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준비한 한 줄, 한 토막에 색채의 농담을 입혀 미리 배접해둔 캔버스에 단단히 고정해야 비로소 ‘조각한지그림’의 완성을 본다. ‘흐름’(Flow)이란 타이틀이 붙은 연작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 수고를 화단은 외면하지 않았다. 거는 족족 팔려나갔으니까. 국내외를 가리지도 않았다. 2019년, 후배 작가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 서른셋에 서울도 아닌 고향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데뷔한 지 이제 5년. 그새 개인전만 아홉 차례고, 독일·스페인·미국 등 글로벌 단체전에 작품을 날려보낸 것도 10회 가까이 된다. 포인트는 아트페어. 키아프·아트부산·화랑미술제 등 주요 미술 큰 장에서 줄줄이 완판돼 두각을 나타냈으니까. LA아트쇼, 포커스 아트페어 파리, 아트마이애미 등 해외에서도 ‘없어서 못 파는 작품’이 됐다. 오죽하면 미술시장이 불황의 늪에 푹 빠진 상태에서 열린 지난 9월 키아프에서조차 “작품을 바꿔 걸며 10여점”을 팔아치웠다고 할까.

갤러리조은의 성연화 개인전 ‘정체성’ 전경. 이번 개인전에서 메인자리를 내준 ‘흐름(Flow) 24-003-005’(2024·100×80.3㎝·왼쪽)과 ‘흐름(Flow) 24-003-004’(2024·100×80.3㎝)이 나왔다. 화단에 작가가 이름을 제대로 알린 연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작가 성연화(38). 9번째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이다. 이 갤러리의 전속작가로도 활동하는 그이는 여기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두 번의 개인전을 펼쳤다.

그런데 의외다. 그간 중심에 뒀던 ‘흐름’ 연작이 슬쩍 뒤로 빠진 느낌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전시마다 ‘흐름’과 늘 붙어다니던 ‘평온’(Serenity) 연작이 앞선 것도 아니다. 캔버스 귀퉁이에 사각한지를 조각퍼즐 맞추듯 붙여낸 그 작품까지 조연으로 보인다고 할까. 그러니 정작 메인자리를 꿰찬 작품은 따로 있다는 뜻인데. 이제껏 도드라진 적이 없는 ‘정체성’(Identity) 연작이 그거다. 전시명으로 ‘정체성’을 내건 이유기도 하고.

한 획 선으로만 승부 내는 작업 ‘정체성’

“어릴 적 한옥에 살면서 가졌던 감정상태, 그때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과거의 기억이 캔버스의 바탕이라면 그 위에 그은 한 줄 선은 지금의 감정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갤러리조은의 성연화 개인전 ‘정체성’ 전경. 전시 타이틀이 된 메인작품 세 점이 나란히 걸렸다. 왼쪽부터 ‘정체성(Identity) 24-001-008’(2024·145.5×112.1㎝), ‘정체성(Identity) 24-001-009’(2024·145.5×112.1㎝), ‘정체성(Identity) 24-001-010’(2024·145.5×112.1㎝)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정체성’ 연작을 일단 찬찬히 뜯어보자. 누르스름한, 바깥쪽으로 나갈수록 더 누르스름한 캔버스 표면에 굵지 않은 선이 길게 그였다. 어떤 화면에는 가로로, 어떤 화면에는 세로로, 또 어떤 화면에는 가로와 세로로. 그래 봤자 작품마다 한두 줄이 전부다. 간혹 봐온, 힘자랑하듯 굵은 붓으로 일필휘지한 여느 붓선과는 전혀 다른 획이다.

“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회화로 와서도 선에 집착하느냐고들 했지만 그 선이 나의 정체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오늘의 나를 남기듯 그어낸다.”

이쯤에서 작가의 이력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요즘 회화작가로는 드물게 작가는 서예를 전공했다. 힘있는 필체라고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던 차에 돌연 작가는 ‘현대서예’를 하겠다고 나섰단다. 캔버스에 연하게 글씨의 형체를 남기거나 한지를 조각내 붙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평생 바른 글씨 쓰기에 정진해온 옛 어르신들의 눈에 좋아 보일 리가 있었겠나. 회화를 하는 쪽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정쩡한 치기 정도로 취급했다고 할까. 작가의 ‘선’은 그렇게 오랫동안 기죽은 채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갤러리조은의 성연화 개인전 ‘정체성’ 전경. 복도를 경계로 ‘평온’(Serenity·왼쪽)과 ‘정체성’(Identity) 연작이 나뉘었다. 왼쪽부터 ‘평온 24-002-005’(2024·90.9×72.7㎝), ‘평온 24-002-006’(2024·90.9×72.7㎝), ‘정체성 24-001-008’(2024·145.5×112.1㎝), ‘정체성 24-001-009’(2024·145.5×112.1㎝), ‘정체성 24-001-010’(2024·145.5×112.1㎝)(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전 전시에서 소심하게 작은 작품으로 슬쩍 끼워넣었다가 우려만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는 듯해서 이번에 마음을 크게 먹었다.” 사실 단 한 번만 허용되는 획이다. 공들여 배접한 캔버스도 획이 틀어지면 그냥 내다버려야 할 만큼 ‘간 큰 작업’인 거다. “수정할 수 없다. 오로지 선으로만 승부를 봐야 한다는 부담감도 크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기록한다는 의미로 제대로 나 자신을 던져보자 했다.”

서양화 붓보단 손에 익은 서예붓을 쓴다고 했다. 검은 선도 물감이 아닌 먹이다. 다만 바탕을 마무리할 땐 아크릴물감으로 덮는다. 귀퉁이로 갈수록 슬쩍 진해지는 “때를 태우는” 작업은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커피물과 오일파스텔이란다.

그런데 왜 저토록 가느다란 선이어야 했나. “여백에도 힘이 있다고 믿어서다. 저 큰 공간에 내 생각을 넣고 다른 이들의 생각도 넣고 말이다.” 대붓으로 굵직하게 긋는 건 예전부터 작가가 가장 잘하던 일이라는데, 붓이 굵어지면 “생각을 던지기보다 퍼포먼스에 치중할 거 같아” 일부러 피했다는 거다.

작가 성연화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에서 연 개인전 ‘정체성’에 건 자신의 작품들 사이에 앉았다. 작가 왼쪽으로 ‘정체성 24-001-007’(2024·90.9×72.7㎝), 오른쪽으로 ‘흐름(Flow) 24-003-006’(2024·193×130.3㎝)이 걸렸다. 쉬어가는 자리로 만든 ‘스툴’도 작가가 직접 제작을 했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익숙함이 발목 잡지 않을까”

그럼 이제 이토록 철학적인 작업에 지극히 세속적인 질문만이 남지 않았나. 작가라면 으레 시장에서 검증된 작품에 몰입하기 마련인데 왜 굳이 돌아가느냐 말이다. “지난 2년 간 수없이 작품을 제작하며 점점 익숙해져가는 게 싫더라. 그 익숙함이 발전이 아니라 발목을 잡는 듯했고.”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들뜬 감정이 생겼나 보다’고도 했다. “색이 갈팡질팡하고 채도가 높아지며 화면이 밝아지는 걸 보면서 차분히 나를 내려놓는 게 좋겠다” 했다는 거다.

그렇다고 첫날에 다 팔아치운다는 ‘흐름’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니다. ‘평온’까지도 다함께 끌고 갈 거란다. “기억과 시간이란 주제는 동일하니까. 어린 시절 기억과 맞물린 ‘평온’, 찰나의 순간을 기억하려는 ‘정체성’까지, 풀어내는 방식만 다르니까.”

갤러리조은의 성연화 개인전 ‘정체성’ 전경. 한 점 한 점 천천히 보면서 지나가는 관람객을 만났다. 왼쪽에 ‘평온(Serenity) 24-002-003’(2024·72.7×60.6㎝)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를 다시 만난 건 1년 9개월 만이다. 중견작가 채성필(52)·장광범(52)과 3인전을 열며 갤러리조은과 첫손을 잡았을 때였다. 작가의 연륜으로나 작품의 규모로나 두 선배에 비해 한참 밀릴 법도 한데 작품은 전혀 기죽지 않았더랬다. 그 기세로 순풍에 돛단 듯한 판매행진을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고. 그간 어떤 심정적인 변화가 있었을까.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불안하기도 하고. 혹시 그림이 안 팔리면 ‘작업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생각하게 될까 봐.”

바로 이런 다짐을 에두른 거다. 내 길을 묵묵히 가기 위해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단속할 거란 다짐. 이제야 ‘정체성’을 둘러싼 행간이 제대로 읽힌다. ‘먹선 한 줄’로 되돌아가야 했던 젊은 내공의 깊이는 강력한 덤이고. 전시는 1월 4일까지.

갤러리조은의 성연화 개인전 ‘정체성’ 전경. 한 관람객이 ‘흐름’(Flow) 연작과 ‘평온’(Serenity) 연작이 걸린 코너를 둘러보다 한 작품(‘평온 24-002-002’ 2024·53×45.5㎝) 앞에 오래 머물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무안공항 여객기 잔해
  • 시선집중 ♡.♡
  • 몸짱 싼타와 함께
  • 대왕고래 시추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