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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잔뜩 내려앉은 하늘이 결국 비까지 뿌려댄다. 하지만 그까짓 게 뭐 대수랴. 세상을 빚는 일, 하늘과 강이 부딪쳐 생명을 내는 작업에는 그저 소소한 이벤트일 뿐이다. 강 둔턱과 연결된 너른 평지. 그 품에 안기듯 울뚝불뚝 솟은 ‘작품’들이 그렇게 말한다.
왜 아니겠나. 우주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내다가 잠시 쉬러 왔다는 ‘운석’(김데몬·한국)이 박혀 있고, 달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정자에 걸어둔 ‘프라이빗 문’(레오니드 티쉬코프·러시아)도 보인다. 대밭에서 끊어낸 살점으로 엮은 ‘리버 보우’(벤 버틀러·미국)를 스치면, 오래전 바다 끝으로 사라졌다가 문득 나타난 귀신고래의 ‘수평회유’(정혜경·한국)도 맞을 수 있으니.
울산 ‘태화강 철새공원’ 일원. 여름 내내 머물던 백로가 떠나고 겨울을 지내러 떼까마귀·갈까마귀가 날아들기 전, 그 배웅과 마중의 즈음에 ‘2020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TEAF20)가 어김없이 열렸다. 올해로 14회를 맞은 국내 유일의 설치미술제다. 한국을 앞세워 미국·독일·러시아·스페인·남아프리카공화국·일본 등 7개국에서 18개팀 20명의 작가가 참여해 18점을 세웠다. 저마다 ‘스케일’에 버금가는 ‘스토리’를 내건다.
코로나19에 행보가 막힌 해외작가들은 직접 날아오는 대신 작품을, 또 ‘설치조각’ 특성상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도면·스케치·재료 등을 보내왔단다. 그 원초적인 형태에 살을 붙이고 피를 돌게 한 건 한국의 테크니션들이라고 했다. 작가의 손·발, 머리·가슴을 자처해 작품을 조립하고 다듬었다. 그렇게 태화강변을 낀 너른 둔치는 또 한번 ‘열린 미술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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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공간에 강·지구·우주 철학 품은 거대 규모로
올해 주제는 ‘손 안에 작은 광석’. 손 안에 올릴 수도, 작지도 않은 작품들이 즐비한 모양새와는 한참 동떨어진 이 테마에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핀란드의 뉴미디어학자이자 미디어 고고학자인 유시 파리카(44)를 차용했다고 하니. 파리카는 “우리는 누구나 아프리카에서 온 작은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사회학자 벤저민 브래튼의 문장을 가져다가 첨단기술인 디지털조차 ‘물질적’이라고 주장했더랬다. 지구에 원초적으로 속한 광물·금속 등에 의존하기 때문이란 건데. 그 대표적 ‘디지털 물질’이 모두의 손 안에 들린 휴대폰이란 거다. 아프리카에서 나는 광석을 핵심재료로 사용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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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작가 정혜경(43)은 울산 앞바다에 서식하던 귀신고래를 소환했다. 지름 10m의 황금빛 바다를 만들고 그 위에 고래를 얹었다. 새끼가 태어나면 4m쯤 된다는 얘기에 고래 길이는 거기에 맞췄다. 식당에나 있어야 할 스테인리스 식기구를 가져다가 용접으로 살을 붙이고, 고래 몸에 박혀 기생한다는 따개비를 형상한 유리구슬을 박았다. 1338개, 이는 1911∼1964년 울산 앞바다에서 사라진 고래 수란다. 그러곤 그들의 진짜 귀환을 바라는 뜻으로 ‘수평회유’(2020)라 이름 붙였다.
태화강 십리대숲에서 자란 대나무는 미국작가 벤 버틀러(42)의 작품이 됐다. 거대한 배인 듯 새인 듯, 높이·길이가 4m에 육박하는 구조물 ‘리버 보우’(2020)로 우뚝 섰다. 그간 그의 작품은 전형적인 나무토막을 소재로 활 모양 외현에 치중했던 터. 대나무 덕에 이번 작품이야말로 주제·장소로까지 확장한 의미를 제대로 품게 됐다. 우주의 빛과 그림자를 형상화한 ‘빛의 이면’(2020)도 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가 신봉철(39)이 유리로 세운 장벽이다.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아름다운 가상이 출현하는 방식”이란 평을 얻은 작품 역시 4m 높이로 ‘벽 아래 인간’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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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공원 어디서나 눈에 띄는 7m 높이의 탑도 있다. 작가 아트놈(49)이 자신의 강아지 캐릭터인 모타루(‘뭣하러’란 사투리 발음)를 쌓은 ‘모타루 탑’(2020)이다. 돌을 겹겹이 얹고 소원까지 얹어냈던 풍습을 빌려 재난극복의 염원을 담아 봤단다. 경쟁하듯 하늘로 뻗친 형상을 가장 낮은 곳으로 불러내린 작품은 작가 장준석(50)의 ‘태화강 은행나무 숲1길’(2020)이다. 실제 은행나무 숲 사이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오솔길에 작가는 세라믹타일 1600장을 깔고 길과 인간을 연결한다. 미술제가 끝나면 1600장 타일은 모두 시민에게 내어줄 예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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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서 직접 설치…시민과 제대로 소통한 ‘공공미술’
박 감독은 “미술제에 참가한 18개팀에 내건 조건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현장에서 설치작업을 할 것. 보통 작업실에서 완성을 보고 하루나 이틀 전쯤 전시장에 옮기는 일을 애초에 차단했다는 건데. 이유는 간결하지만 선명하다. 작업을 하면서 시민과 소통을 하자는 거다. ‘무엇’에도 ‘왜’에도 ‘어떻게’에도 답을 직접 내주자는 건데. 맞다. 바로 그것이 공공미술이니까. 경험과 생각, 흘리는 땀까지 공유하는 그것. 덕분에 지난여름 작가들은 무섭게 퍼붓던 장대비를 꽤 맞았나 보다. 그 비가 그친 다음엔 매일 쏟아지는 햇살과의 씨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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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제가 열린 태화강 철새공원 일원은 지난해 ‘태화강 국가정원’이란 타이틀까지 꿰찬 곳이다. ‘순천만 국가정원’에 이어 국내에선 두 번째. 철저히 산업도시였던 울산, 그 중심에서 ‘죽음의 물’이라 불렸던 태화강의 대반전이었던 셈인데. 사실 그와 궤를 맞춘 게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기도 하다. 1997년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하고 ‘태화강 살리기’를 시작한 지 10년째던 2007년, 자축을 겸해 띄운 프로젝트였던 거다.
야심차게 출범하고 15년을 바라보지만 아쉬움이 없진 않다. 시스템이나 인프라보단 개인기에 의존하는 운영 탓이다. 턱없이 낮은 예산, 한손에 꼽힐 진행요원, 기획부터 설치까지 고작 석달여 준비기간 등이 ‘국내 유일’이란 타이틀을 무색케 하는 거다. 열흘 남짓한 짧은 전시기간도 못내 섭섭한 노릇. 올해 작품들도 작업 열기가 채 식기 전인 25일까지만 전시한 뒤, 일제히 철거수순을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