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해” 묻지마 고소·고발 공화국…경찰력 낭비 논란

年 고소·고발 접수 80여만명…기소율 16% 불과
일부 단체, 진영따라 묻지마식 고소·고발 남발
민사분쟁 해결·합의유도 노리고 남용도 잇따라
전문가 "악의적 고소·고발인에 엄정 대처해야"
  • 등록 2021-07-26 오전 6:00:00

    수정 2021-07-27 오후 4:28:54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김모(39·여)씨는 지난 5월 국민신문고에 명예훼손과 모욕을 당했다며 진정을 냈다. 김씨가 운영하는 식당에 방문한 손님 중 한 명이 인터넷에 악의적인 후기를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해당 식당에서 불쾌한 서비스를 받은 손님들의 후기는 한둘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게재된 후기와 피고소인 조사 등을 통해 경찰은 ‘혐의없음’으로 불송치 결정했다.

시민단체 활빈단은 지난 1월 강제추행 혐의로 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를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고발했다. 피해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의사와 상관없는 ‘묻지 마’ 고발이었다. 성범죄는 피해자 의사와 별개로 수사·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찰은 고발장을 접수해 절차에 따라 지난 2월 고발인 조사를 진행했지만, 피해자가 수사를 원치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결국 수사를 종결했다.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단 고소·고발장부터 내는 ‘묻지 마 고소·고발’로 경찰이 일에 허덕이고 있다. 작년 한 해 전체 형사사건 중 고소·고발이 차지하는 비율은 30%를 넘고, 고소·고발로 접수 처리된 사람은 80만명이 넘는다. 요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엉터리’ 고소·고발이 적지 않아 범죄가 성립되는 기소는 10명 중 2명에도 못 미쳤다.

최근 국민의 권리의식 향상과 인권 감수성이 강화됐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묻지 마 고소·고발로 뭐든지 법으로 해결하려는 ‘고소공화국’이 됐다며 범죄 수사나 치안 유지에 쓰여야 할 경찰력이 낭비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5년간 고소·고발로 접수 처리 현황[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고소·고발 증가에도 기소율은 감소

23일 법무부 ‘2021 법무연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고소·고발로 접수되어 처리된 사람의 수가 증가세다. 2016년 74만4960명, 2017년 72만9229명, 2018년 78만2251명 등으로 70만명대 수준이었는데 2019년 85만551명, 2020년 84만3712명 등으로 80만명대 수준으로 급증했다.

문제는 범죄 성립 여부를 나타내는 기소율은 줄어들고 있는 점이다. 2014년 이전 고소·고발 사건의 기소율은 평균적으로 20% 이상으로 집계됐으나 2015년 이후에는 20% 이하로 떨어졌다. 실제 2016년(19.4%), 2017년(18.6%), 2018년(17.3%), 2019년(16.5%), 2020년(16.0%) 순으로 지속적으로 기소율은 감소했다. 이는 고소·고발 사건은 증가하고 있으나 정작 기소는 되지 않는 고소·고발 남용 현상이 점차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와 사법체계가 유사한 일본과 비교해보면 고소·고발 남용 현상은 뚜렷하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의 ‘고소·고발 남용 등에 대응한 입건 관행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평균 1068명이 고소를 당하고 있는데 일본은 7.3명으로 146.4배까지 차이가 난다. 2018년에는 이러한 차이가 217배로 더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고소·고발인들은 ‘무임승차’ 현상을 보이고 있다. 치안정책연구소 연구진은 “고소장을 접수하는 데 별도의 비용이 없다 보니 남용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이 낮다”며 “국민편익적 입장에서 고소의 방법을 쉽게 하기 위해 국민신문고, 사이버 경찰청 등 인터넷상으로도 고소할 수 있고 제한도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현행법상 고소·고발인은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는 상황이라 이를 남용하는 경향이 짙다는 얘기다.

‘프로고발러’ 시민단체, ‘묻지마’ 고소·고발 남발

올해 1월 1일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따라 검찰의 지휘권한을 폐지하고 경찰이 1차 수사 종결권을 쥐게 되는 등 권한은 막강해진 한편, 일선 경찰관들은 늘어나는 고소·고발에 서류 작업 등 급증한 업무량에 매일 야근이 일쑤다.

서울의 한 경찰서 사이버수사팀에 근무하는 경찰관 김재민(가명)씨는 평일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과도한 업무량에 하반기 인사 때 다른 부서에 지원을 고려하고 있다. 그는 “사이버팀 수사관 1명이 평균적으로 40건에서 많게는 50건까지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며 “선거철이나 정치·사회적 이슈가 있으면 시민단체의 고소·고발 사건이 급증한다”고 호소했다.

특히 법치주의 바로세우기 행동연대(법세련), 사법시험준비생모임(사준모), 사법정의바로세우기시민행동(사세행), 자유대한호국단,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적폐청산연대), 활빈단 등 ‘프로고발러’로 불리는 단체들은 잦은 고발로 모든 문제를 사법화해 갈등을 키운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자유대한호국단은 4·7 보궐 선거기간 동안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적폐청산연대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병역법 위반 혐의로, 사세행은 윤석열 전 총장 부인 김건희씨를 사문서 위조행사 공범 혐의로 고발하는 식으로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고발을 이용하고 있다.

일선 경찰에서는 뭐든지 법으로 해결하려는 ‘고소·고발 공화국’이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 관계자는 “고소·고발이 늘어나 현장에서 뛰는 수사관들은 업무 과중으로 일손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단체 이름 알리기나 정치적 진영논리로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것은 경계해야한다”고 지적했다.

또 고소·고발 남용의 주된 요인으로 ‘민사분쟁형’이 꼽힌다. 개인 간 채무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기 위해 사기·횡령·배임 등 ‘재산범죄’로 빙자해 고소·고발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이어 ‘합의유도형’도 있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는 사이버 명예훼손·모욕 사건 등 고소·고발장 접수시 피고소·고발인이 ‘피의자’ 신분의로 전환되는 점을 악용해 합의 유도를 위한 압박용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묻지마식 고소·고발은 경찰의 범죄 수사나 치안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며 엄정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치안정책연구소 연구진은 “현장에서 엄청난 양의 고소·고발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수사관들은 만성적인 업무량 가중으로 소진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정작 도움이 필요한 범죄 피해자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악의적으로 허위사실을 고소·고발한 것이 명백한 경우라면 무고죄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사하는 등 대응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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