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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 반세기)”위기의 도래”…외환대란②
- [이데일리 이종석기자] 97년 11월16일 오후 6시30분.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 스위트룸. 비밀리에 한국에 들어온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은 총재와 마주 앉았다. 강 부총리가 한국의 외환보유고 현황을 브리핑하고, IMF의 지원 가능성을 타진했다. 환율변동제한폭 확대를 골자로 하는 금융시장안정대책이 곧 발표될 것이라는 내용도 언급됐다. ◇ “은행 2곳, 종금사 12곳 폐쇄시켜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캉드쉬 총재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지원하면 되겠습니까?” “최소한 300억달러는 돼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제규모라면 그 정도 돈은 있어야겠지요.” 300억달러 규모 IMF 구제금융 방안은 이렇게 가닥을 잡았다. 이날 회의에서 양측은 자금지원 규모 외에 몇가지 추가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게 된다. 잠정 합의된 사항은 “▲11월19일 한국 정부가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신청하고, ▲IMF는 구제금융 신청 다음날인 20일 실사단 1진을 한국에 파견하며, ▲300억달러 중 1차분은 연내에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논의가 마무리될 즈음 캉드쉬 총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요?” “대통령 당선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당시는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등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선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경식 총재가 답하자 캉드쉬는 “그러면 후보들의 동의서라도 받아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다. 차기 정권을 잡을 지도자로 부터 IMF 요구사항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확약을 분명히 받아 두겠다는게 캉드쉬의 계산이었다. 강 부총리나 이 총재나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캉드쉬 총재가 돌아간 후 구체적인 지원조건을 놓고 한국 정부와 IMF간의 실무협상이 진행됐다. 협상이 막바지에 달할 즈음 IMF측이 새로운 부속합의서를 들고 나왔다. “서울, 제일은행 등 2개 시중은행과 12개 종합금융사를 즉각 폐쇄하라”는 것이었다. 거시 산업 노동 금융 대외거래 등 상당 부분에서 합의를 이루고 양해각서까지 교환하고 난 상태에서 IMF측이 추가로 내놓은 부속합의서였다. 당시 폐쇄대상 종금사로 청솔종금 한 곳만을 염두에 두고 있던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였다. 한국 대표단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IMF는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비밀리에 방한한 립튼 미 재무차관이 IMF 협상단을 막후에서 진두지휘하기 시작하면서 IMF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졌다. 당장 사정이 급한 한국 대표단은 저자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9개 종금사를 영업정지시키고, 2개 은행 처리는 6개월의 여유를 두고 추진한다’는 선에서 막판 합의를 보게 된다. 밀고 당기는 협상을 거쳐 12월3일 마침내 “IMF 대기성차관에 관한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이로부터 이틀 후 IMF 1차 지원금 56억달러가 국내에 입금된다. 두고두고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IMF 경제신탁통치’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 "전쟁터에서 장수를 바꾸다"...강 부총리 경질97년 당시 상황에 대한 정부의 대처방식과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상황이 국가부도에 이를 정도의 중차대한 지경이었음에 불구하고 대통령과 경제부총리 사이에 충분한 정보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김 대통령은 강 부총리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강 부총리는 97년 9월부터 “열린 경제로 가기 위한 국가과제”라는 제목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국경제는 펀더멘털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게 강연의 요지였다. 하지만 10월중순 이후 예정된 강연은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한가한 소리 좀 그만하라”며 김 대통령이 중간에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 이 무렵 부터 김 대통령은 강 부총리 보다는 이경식 한은 총재나 홍재형 전 장관 등 다른 루트를 통해 경제상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한은 등 일부 기관에는 "재경부 지시를 받지 말고 내 지시만 받으라"며 엄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김 대통령이 강 부총리를 어느 정도 불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결국 11월19일 강 부총리를 전격 경질한다. 후임에는 임창렬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이 임명됐다. 강 부총리는 밤샘 작업을 해가며 마련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보고하기 위해 19일 오전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으나 “이제 그만 쉬라”는 대통령의 통고를 받고 돌아서야만 했다. 이유야 어쨌든 IMF 구제금융 협의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 경제사령탑이 교체됨에 따라 적지 않은 혼선이 빚어지게 된다. IMF 구제금융 신청사실 공표가 예정보다 이틀이나 늦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흘 전인 16일 캉드쉬 총재와 강 부총리간의 비밀회동에서 양측은 ‘한국 정부가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19일 공식 발표하고, 다음날인 20일 IMF 실사단 제1진이 한국에 입국’하는 것으로 잠정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19일 취임한 임창렬 신임 부총리는 이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캉드쉬 총재와 합의한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IMF에 지원을 요청할 계획은 없느냐”고 묻자 “우방국들이 지원해주기만 하면 IMF 도움 없이도 해결이 가능하다”며 엉뚱한 답을 내놓기 까지 했다. 재경원 실무진들은 당황했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워 한 것은 미국과 IMF측이었다. 워싱턴에서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출국준비를 하던 IMF 실사단 3명은 다시 짐을 풀어야만 했다. 다음날 오전 예정에 없던 루빈 미 재무장관의 성명이 튀어 나왔다. “한국이 현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금융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신속하게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꾸물대지 말고 빨리 IMF에 지원을 요청하라는 암묵적인 요구였다. 그렇다면 임 부총리는 왜 캉드쉬와 합의한 IMF행을 19일 발표하지 않았던 것일까? 임 부총리는 후일 이에 대해 “IMF행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날 발표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부총리에 임명된 당일 곧바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업무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IMF 지원여부에 따라 하루에 수억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실책이었다. 외환대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정부의 정책집행시스템이 사실상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임 부총리는 세부사항을 다시 보고받은 후 결국 합의한 날짜보다 이틀 늦은 21일 밤 IMF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대외에 공표하게 된다.(→)
- (한국경제 반세기)”위기의 도래”…외환대란①
- [이데일리 이종석기자] 1997년 12월3일. 우리 역사에 기록된 경제 국치일(國恥日)이다.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밤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 구제금융을 위한 정책이행각서에 서명했다. 이른바 “IMF체제”의 시작이었다. IMF체제는 국민생활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은행, 대기업 등이 줄줄이 문을 닫거나 통폐합됐고, 100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계는 가계대로 얇아진 월급봉투에 맞추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불과 1년전 선진국 사교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해 어깨를 으쓱대던 자부심은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온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가혹한 시련이 한국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GET OUT OF KOREA. RIGHT NOW” 97년 외환위기 일지는 한보철강 부도에서 부터 출발한다. 신년 벽두, 한보철강이 5조원대의 부도를 낸 것을 시작으로 삼미 진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의 부도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누적된 경영부실에 경기불황 까지 겹치면서 잘 나가던 대기업들이 잇따라 자금난에 내몰렸다. 7월15일 당시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가 마침내 부도방지협약 대상기업으로 선정됐다. 사실상의 부도였다. 투자자들은 위기를 감지했고, 발빠른 선수들은 자금을 빼내가기 시작했다. 한보가 위기의 서막이었다면 기아는 클라이맥스였다.대외 여건도 악재투성이였다. 7월2일 태국 바트화가 폭락한데 이어 8월14일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붕락했고, 이어서 10월23일에는 홍콩증시가 대폭락했다. 특히 홍콩증시 폭락은 외환위기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한국시장에 치명타였다. 동남아 투자를 늘려왔던 종금사들과 이들을 상대로 금리장사를 해왔던 국내은행들은 10.23 홍콩사태를 계기로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게 된다. 외국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동남아국가 채권을 매입하고 이를 다시 담보로 넣는 소위 레버리지 레포(REPO)거래를 해온 종금사들로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동남아 사태로 인해 담보가치가 떨어져 부족분만큼 돈을 더 넣어야만 했지만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종전에는 시중에서 달러를 빌릴 수 있었지만 이미 은행들도 라인이 끊어진 상황이었다. 홍콩 사태의 파장은 즉각 반영됐다. 다음날인 24일 종합주가지수는 33.15포인트 폭락했다. 스탠더드앤푸어즈(S&P)는 이날 AA+(우수)였던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양호)로 한 단계 떨어뜨리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사실상 외환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이런 와중에 모건스탠리증권이 10월27일 전세계 투자가를 대상으로 한 장의 긴급 전문을 날렸다. “아시아지역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 즉시 팔아치우고 빠져 나오라”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다음날인 28일 종합주가지수가 또다시 35포인트 폭락하면서 저항선으로 여겨졌던 500선이 붕괴됐다. 환율은 가격제한폭 까지 뛰어 올랐다. 당시 외국인투자자들의 한국 탈출은 엑소더스를 방불케 한다. 10월 한 달에만 무려 1조원 이상의 자금이 서울을 빠져나갔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한국을 탈출하라”는 외국계 기관들의 경고 사이렌이 잇따라 울려대기 시작했다. 11월5일 미국계 블룸버그 통신이 “한국의 가용외환보유고는 20억달러에 불과하다”며 위기감을 조장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세계 주요 언론들이 블룸버그를 인용해 한국의 경제위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같은 날 저녁 홍콩페레그린증권이 한국경제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타를 날린다. 이날 홍콩페레그린증권이 전세계에 뿌린 보고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Get out of Korea. Right Now”이유 불문하고 지금 당장 한국에서 빠져 나오라는 급전이었다. ◇ 한달새 1조원 이상 빠져 나가외국계를 중심으로 경고사이렌이 잇따라 울려대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무엇이 잘못됐는 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이었다.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IMF행을 포함한 대응책을 논의한 것은 블룸버그와 홍콩페레그린증권의 경고사이렌이 울린 직후인 11월7일이었다. 이날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부총리로 부터 “최악의 경우 IMF에 갈 수도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윤진식 청와대 비서관이 대통령과 면담해 “각하, 돈줄이 꽉 막혔습니다”며 직보를 올린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상황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다음날 이경식 한은 총재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이 총재. 갱제(경제)가 이래 가지고 되겠나?” “각하 큰일입니다. 나라가 부도나기 직전입니다” “그러면 우에 하노?” “미국은 돈 안줍니다. IMF에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설마 IMF에 가기 까지야 하겠나..”라며 안이하게 생각했던 대통령은 이날 이 총재와의 통화 이후 “IMF로 가야 한다”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잃어버린 5년, 칼국수에서 IMF까지" 동아일보) 대통령의 결심은 11월14일 강 부총리의 청와대 보고 자리에서 표면화됐다. 김 대통령이 먼저 “나라가 결딴날 판국이다. IMF로 가라.”며 확답을 내려준 것이다.이로부터 일주일 후 정부는 캉드쉬 총재와의 비밀 협의를 거쳐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다. <97년 외환위기 일지> - 1월23일 ; 한보철강 부도- 3~6월 ; 삼미 진로 등 대기업 연쇄 부도 - 7월2일 ; 태국 바트화 폭락 - 7월15일 ; 기아 사실상 부도, 협조융자 신청 - 8월14일 ;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폭락 - 8월25일 ; 정부 대외 금융기관 채무보증 약속 - 9월19일 ; 주가 700선 붕괴- 10월13일 ; 16개 종금사에 1조원 한은 특융 - 10월22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10월23일 ; 홍콩증시 폭락 - 10월28일; 주가 500선 붕괴- 11월1일 ; 해태그룹 게열사 화의, 법정관리 신청- 11월4일 ; 뉴코아그룹 화의 신청- 11월5일 ; 블룸버그 “한국 가용외환보유고 20억달러” 보도 - 11월5일 ; 홍콩페레그린, “Get Out of Korea” 보고서 발송- 11월10일 ; 환율 사상처음 달러당 1000원선 돌파- 11월14일 ; 김영삼 대통령 IMF행 결심 - 11월16일 ; 캉드쉬 IMF총재 극비 방한, 구제금융 방안 논의 - 11월19일 ; 강경식 부총리 경질, 임창렬 신임 부총리 임명 - 11월20일 ;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방한- 11월21일 ; IMF 구제금융 신청 공식 발표 - 11월23일 ; IMF 실사단 1진 입국- 12월3일 ; 대기성 차관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 12월5일 ; IMF, 1차 지원금 56억달러 제공 (→)
- (글로벌 워치)美 언론의 위기 대응법
- [이데일리 조용만기자] 10여년전 기자 초년병 시절.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참사…. 웬 대형사고가 그리 많은지. 취재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든 건 데스크 통과하기. 항상 듣는 질책은 도대체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소위 `야마`가 뭐냐는 것이다. "예전에도 위험 경고가 있었는데 유야무야 했다는데요""야! 그러면 야마가 한 눈에 팍 들어오게 써야지..예고된 인재구만"데스크는 공사를 시작하고, 허름한 작문은 어엿한 기사로 포장이 됐다. 문제는 가끔씩 데스크가 팩트와 주제를 침소봉대하는 데 있다. 기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 `초를 치는` 것인데, 팩트를 앞지르는 `빙초산`이 쓰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경제기사도 종종 과잉이 문제다. 조짐이 감지되면 `대란`과 `위기설`로 치고나가 이슈를 선점하는 식이다. 부실정리 과정은 환매대란, 신용대란, 카드대란으로 이어졌고 주택가격 상승은 전세대란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채권 만기도래가 집중되는 시기는 `0월 위기설`로 포장되기 일쑤였다.언론의 선제적 경고는 감시견 본연의 책무이기도 하다. "펀더멘털은 좋다"는 호언장담을 믿다가 IMF 경제 식민지를 경험한 국내언론이 위기 가능성에 경각심을 보일 필요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과유불급, 상습적이고 지나치다면 이로울 게 없다. 초유의 재난을 전하는 미국 언론의 대응은 우리와 좀 다르다. 위기 가능성을 충분히 언급하지만, 한편으로 냉정하고 실속도 챙긴다. `카트리나`는 사회적 이슈였지만 발발 초기부터 유가급등을 불러오며 경제적 관심사로 급부상했다. 참상과 피해규모가 드러나면서 인플레이션과 성장 둔화 경고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언론들은 피해규모가 불어나고 경제적 위기감이 고조되던 9월초에 `카트리나가 미국 경제에 이롭다`는 엉뚱한(?) 기사를 써댔다. 경제 펀더멘털이 튼튼해져서 웬만한 자연재난은 극복할 수 있고, 건설붐이 일면서 꺼져가던 부동산 불씨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부시 대통령이 막대한 복구자금을 투입, 재난대응에 적극 나서면서 카트리나발(發) 리세션은 없다는 전망은 확신 수준으로 굳어져갔다. 월스트리트나 뉴욕타임스 등이 경제에 끼칠 위험에 대해서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가 문제와 함께 피해규모, 일자리 감소 등 다양한 내용을 다뤘지만 발빠르게 치고 나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국제 투자은행과 신용평가사, 유수 언론들은 그동안 3위 일체가 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누구보다 빨리 위기 가능성을 전파해왔다. 하지만 카트리나발 위기에 대해서는 단기적 충격이 있지만 좀 더 길게 볼 필요가 있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트리나 타격후 휴가를 접고 부랴부랴 복귀한 부시 대통령은 "허리케인 복구에 수년이 걸릴 것이며 전략비축유를 방출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월가 투자자들의 속내는?"복구에 수년이 걸리면 앞으로 몇 년간 지속적으로 투자가 이뤄진다는 얘기로군. 비축유를 풀면 유가는 떨어질 테고. 원래 자연재해란 게 길게 보면 득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뉴욕도 아니고 딥사우스라니" 카트리나가 덮친 남부 3개주가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하다. 초기 대응을 잘못해 정치적 위기를 맞은 부시는 끌어안고 있던 비축유를 푼다고 했다. 앞으로 정부가 투입할 복구비는 재산피해 규모를 웃돈다. 하락한 GDP는 복구작업이 진행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해진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월가의 대변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신문외에 통신(다우존스) 주간지(배런스) 등을 통해 세계 금융시장과 투자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단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이 있겠지만 월가는 장기적·긍정적 요인에 초점을 맞췄고 이들의 입장은 신문, 통신을 통해 충실히 전달됐다.카트리나 쇼크는 물가, 실업, 소비 등을 통해 지표에 꾸준히 반영되겠지만 미국 언론의 `사려깊은` 대응으로 금융시장에는 연착륙했다.유수 언론들이 실속을 차리면서도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신중하고 편중되지 않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3대지 기사는 대부분 장문이다. 제목은 방향성을 가지되, 하나의 기사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싣는다. 언론재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신문이 기사에서 인용하는 취재원 수는 2명이 채 안된다. 뉴욕타임스가 인용하는 취재원은 10명이 넘는다. 미국 언론계에는 하나의 기사에 최소한 2명 이상의 취재원을 활용하도록 하는 `투 소스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 1~2명의 전문가로 `위기론`을 대변하기는 수월하다. 하지만 10명이 넘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한 기사가 한쪽으로 방향을 잡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가. 기업도 1차 부도는 보도를 삼가던 시절, 외환위기때 우리 언론은 `국가부도 임박`이라고 썼다. 앞서 치고 나가면 됐지, 누구 좋은 일 시키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후에도 조짐이 보이면 내쳐 달렸다가 중간에 상황이 진정되면 "어? 여기가 어디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란과 위기가 현실화되지 않으면 언론의 사전 경고 덕분이라고 우기는 `아전인수`도 있었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정치적 이유로 경제위기를 조장한다며 대통령과 보수 언론간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불신만 깊어졌고 나아진 것은 없다. 그만큼 겪었으니 우리 언론의 위기 대응 역량도 향상될 때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