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換亂10년)”위기의 도래”…외환대란①

정경유착, 차입경영, 금융부실, 부패관행의 총체적 결과
국가 부도 직전 IMF 구제금융 요청
  • 등록 2007-12-03 오후 4:35:18

    수정 2007-12-03 오후 4:35:18

[이데일리 이종석기자] 1997년 12월3일.
우리 역사에 기록된 경제 국치일(國恥日)이다.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밤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 구제금융을 위한 정책이행각서에 서명했다. 이른바 “IMF체제”의 시작이었다.

IMF체제는 국민생활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은행, 대기업 등이 줄줄이 문을 닫거나 통폐합됐고, 100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계는 가계대로 얇아진 월급봉투에 맞추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불과 1년전 선진국 사교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해 어깨를 으쓱대던 자부심은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온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가혹한 시련이 한국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GET OUT OF KOREA. RIGHT NOW”

97년 외환위기 일지는 한보철강 부도에서 부터 출발한다.
신년 벽두, 한보철강이 5조원대의 부도를 낸 것을 시작으로 삼미 진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의 부도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누적된 경영부실에 경기불황 까지 겹치면서 잘 나가던 대기업들이 잇따라 자금난에 내몰렸다.

7월15일 당시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가 마침내 부도방지협약 대상기업으로 선정된다. 사실상의 부도였다. 투자자들은 위기를 감지했고, 발빠른 선수들은 자금을 빼내가기 시작했다.

한보가 위기의 ‘서막’이었다면 기아는 ‘클라이맥스’였다.

대외 여건도 악재투성이였다.
7월2일 태국 바트화가 폭락한데 이어 8월14일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붕락했고, 이어서 10월23일에는 홍콩증시가 대폭락했다. 특히 홍콩증시 폭락은 외환위기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한국시장에 치명타였다.

동남아 투자를 늘려왔던 종금사들과 이들을 상대로 금리장사를 해왔던 국내은행들은 10.23 홍콩사태를 계기로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게 된다.

외국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동남아국가 채권을 매입하고 이를 다시 담보로 넣는 소위 레버리지 레포(REPO)거래를 해온 종금사들로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동남아 사태로 인해 담보가치가 떨어져 부족분만큼 돈을 더 넣어야만 했지만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종전에는 시중에서 달러를 빌릴 수 있었지만 이미 은행들도 라인이 끊어진 상황이었다.

홍콩 사태의 파장은 즉각 반영됐다.
다음날인 24일 종합주가지수는 33.15포인트 폭락했다. 스탠더드앤푸어즈(S&P)는 이날 AA+(우수)였던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양호)로 한 단계 떨어뜨리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사실상 외환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이런 와중에 모건스탠리증권이 10월27일 전세계 투자가를 대상으로 한 장의 긴급 전문을 날렸다.
“아시아지역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 즉시 팔아치우고 빠져 나오라”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다음날인 28일 종합주가지수가 또다시 35포인트 폭락하면서 저항선으로 여겨졌던 500선이 붕괴됐다. 환율은 가격제한폭 까지 뛰어 올랐다.

당시 외국인투자자들의 한국 탈출은 엑소더스를 방불케 한다. 10월 한 달에만 무려 1조원 이상의 자금이 서울을 빠져나갔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한국을 탈출하라”는 외국계 기관들의 경고 사이렌이 잇따라 울려대기 시작했다.

11월5일 미국계 블룸버그 통신이 “한국의 가용외환보유고는 20억달러에 불과하다”며 위기감을 조장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세계 주요 언론들이 블룸버그를 인용해 한국의 경제위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같은 날 저녁 홍콩페레그린증권이 한국경제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타를 날린다. 이날 홍콩페레그린증권이 전세계에 뿌린 보고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Get out of Korea. Right Now”
이유 불문하고 지금 당장 한국에서 빠져 나오라는 급전이었다.

◇ 한달새 1조원 이상 빠져 나가

외국계를 중심으로 경고사이렌이 잇따라 울려대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무엇이 잘못됐는 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이었다.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IMF행을 포함한 대응책을 논의한 것은 블룸버그와 홍콩페레그린증권의 경고사이렌이 울린 직후인 11월7일이었다.

이날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부총리로 부터 “최악의 경우 IMF에 갈 수도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윤진식 청와대 비서관이 대통령과 면담해 “각하, 돈줄이 꽉 막혔습니다”며 직보를 올린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상황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다음날 이경식 한은 총재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이 총재. 갱제(경제)가 이래 가지고 되겠나?”
“각하 큰일입니다. 나라가 부도나기 직전입니다”
“그러면 우에 하노?”
“미국은 돈 안줍니다. IMF에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설마 IMF에 가기 까지야 하겠나..”라며 안이하게 생각했던 대통령은 이날 이 총재와의 통화 이후 “IMF로 가야 한다”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잃어버린 5년, 칼국수에서 IMF까지" 동아일보)

대통령의 결심은 11월14일 강 부총리의 청와대 보고 자리에서 표면화됐다. 김 대통령이 먼저 “나라가 결딴날 판국이다. IMF로 가라.”며 확답을 내려준 것이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 정부는 캉드쉬 총재와의 비밀 협의를 거쳐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다.

<97년 외환위기 일지>

- 1월23일 ; 한보철강 부도
- 3~6월 ; 삼미 진로 등 대기업 연쇄 부도
- 7월2일 ; 태국 바트화 폭락
- 7월15일 ; 기아 사실상 부도, 협조융자 신청
- 8월14일 ;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폭락
- 8월25일 ; 정부 대외 금융기관 채무보증 약속
- 9월19일 ; 주가 700선 붕괴
- 10월13일 ; 16개 종금사에 1조원 한은 특융
- 10월22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 10월23일 ; 홍콩증시 폭락
- 10월28일; 주가 500선 붕괴
- 11월1일 ; 해태그룹 게열사 화의, 법정관리 신청
- 11월4일 ; 뉴코아그룹 화의 신청
- 11월5일 ; 블룸버그 “한국 가용외환보유고 20억달러” 보도
- 11월5일 ; 홍콩페레그린, “Get Out of Korea” 보고서 발송
- 11월10일 ; 환율 사상처음 달러당 1000원선 돌파
- 11월14일 ; 김영삼 대통령 IMF행 결심
- 11월16일 ; 캉드쉬 IMF총재 극비 방한, 구제금융 방안 논의
- 11월19일 ; 강경식 부총리 경질, 임창렬 신임 부총리 임명
- 11월20일 ;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방한
- 11월21일 ; IMF 구제금융 신청 공식 발표
- 11월23일 ; IMF 실사단 1진 입국
- 12월3일 ; 대기성 차관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 12월5일 ; IMF, 1차 지원금 56억달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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