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만난 사람들)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등록 2007-04-17 오후 12:35:08

    수정 2007-05-01 오전 7:08:35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누가 뭐래도 현대 예술의 총아는 영화다. 세상에 등장한 지 불과 100년이 조금 넘은 영화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무용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갈수록 그 위세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한 편의 영화가 가질 수 있는 힘은 오히려 더 줄어든다. 특히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않는 비주류 다큐멘터리 영화의 위력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호소력 있는 주제와 설득력 있는 논리로 현실을 직시하자고 촉구해도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대중들은 이를 외면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비주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현실과 세상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런 작업을 계속하는 것일까. 예전부터 지녔던 의문을 우연한 기회에 풀게 됐다. `우리는 부채를 믿는다`, `WMD : 대량사기무기`, `미디어 전쟁 : 테러의 시대` 등 논쟁적 다큐멘터리를 만든 독립 영화작가 대니 셰터(Danny Schechter)를 만나고 나서다.




유태계 미국인인 대니 셰터는 거의 모든 언론 분야에 발을 담근 채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독립 영화를 만드는 와중에도 세계 최대 온라인 미디어 이슈 네트워크 웹사이트인 `미디어 채널(MediaChannel.org)`을 운영하고 있다. 주류 미디어에 관한 비판적 논평을 쓰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하고 TV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셰터의 전작 `WMD`는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핑계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주류 미디어가 자행한 현실 왜곡과 거짓 보도들이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 자체보다 더 파괴적인 대량사기무기(Weapons of mass deception)임을 고발한 영화다.
 
셰터는 거침없는 논리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초국적 자본의 미디어 장악과 권력과의 유착이 도를 넘어선 지 오래이며, 현재의 미디어 산업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세상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가 최근 미국의 가계 부채 문제와 신용카드 회사들의 만행을 고발한 새 다큐멘터리 `우리는 부채를 믿는다(In Debt We Trust)`를 내놨다. 맨해튼 워싱턴 스퀘어 인근에서 열린 첫 시사회 때 그를 만났다.

`In Debt We Trust`는 2조달러가 넘는 미국의 신용카드 및 자동차 할부 부채가 단지 부주의하고 무분별한 개인들의 과소비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연간 300억달러가 넘는 이익을 올리는 미국의 신용카드 회사들이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교묘하게 소비자들을 기만하고, 정치권에 로비를 하는 모습 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이 와중에 특히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저소득층이라는 사실도 담긴다. 관련기사☞(필름인뉴욕)부채의 제국과 신용카드
 
신용카드 대란을 겪은 한국에서 온 사람으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들이 많았다.

셰터는 매우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빡빡한 촬영 일정과 후반 작업, 미국 각지에서 열릴 시사회 준비로도 정신이 없는데다 도하 라운드 협상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 주에는 짧은 일정으로 중동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답변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공격적인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개인들이 신용카드를 만들 때 누가 등 뒤에서 총을 들고 위협한 것도 아닌데 너무 개인들의 편만 든 것 아니냐고 물었다. 셰터는 "개인들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신용카드 부채는 사용자들과 신용카드 회사가 공동으로 만든 `복합 문제`(combination problem)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셰터는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코넬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명문 런던정경대(LSE)에서 정치과학을 공부했다. 하버드대학의 부설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인 니만 펠로십(Nieman Fellowship)도 수료한 바 있다. 그 정도의 학력이면 돈과 출세가 보장되는 직업도 많을텐데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물었다. 셰터는 "나는 사람들에게 숨겨진 진실들을 알려주고 싶다"며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통해 세상을 바꾸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의도 자체는 좋지만 정말 당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질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인이 시스템을 바꾸거나 이길 수는 없고, 여전히 부시는 미국의 대통령이며, 이라크 전쟁과 같은 거대한 모순이 우리 주위에 산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셰터의 답변에 사실 좀 놀랐다. 그는 "내가 젊은 학생이었을 때 아파르트 헤이트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 당시에는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조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차별 정책이 폐지되고 만델라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기 어려웠지만 결국 그런 시대가 오지 않았느냐"며 "내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비판 다큐멘터리의 대명사 마이클 무어는 `화씨911`과 `볼링 포 콜럼바인` 등으로 메이저 영화사의 대형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칸 영화제 대상, 아카데미의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 등으로 명예도 얻을 만큼 얻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슷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적 인지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이에 대해 셰터는 "그는 코미디언"이라며 "나와 마이클 무어를 비교하지 말라"고 말했다.

본인의 재정 상황은 어떠한 지, 영화 제작의 재정적 어려움 등은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질문했다. 셰터는 "오늘 취재하러 온 것이 아니라 기부하러 온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진 후 "나의 재정 상태는 최악이지만 어떻게든 꾸려가고 있다"고 답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새삼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영화가 현실을 다시 보게 하고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셰터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독립 영화계는 상당한 재산을 보유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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