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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에 있는 투수 웨스 벤자민은 모자 뒤에 숨겨진 작은 수신기를 통해 어떤 구종과 코스에 공을 던질지 정보를 받는다. 예를 들면 ‘패스트볼, 몸쪽 높게’, ‘슬라이더, 바깥쪽 낮게’ 식으로 전달된다. 그 내용은 뒤에 있는 야수도 3명까지 함께 공유할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 KBO 리그에서도 피치컴(Pitchcom) 시대가 열렸다. 피치컴은 선수들끼리 사인을 주고받기 위한 전자 장비다. KBO 사무국은 지난 15일 KBO리그 10개 구단에 배포했고, 16일부터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KT 외국인 투수 벤자민은 KBO 리그에서 ‘피치컴을 가장 먼저 쓴 투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날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키움 히어로즈와 원정경기에 선발 투수로 나선 벤자민은 불펜에서 포수 장성우와 기기를 점검한 뒤 사용을 결정했다. 투수와 포수 외에도 중견수, 유격수, 2루수가 피치컴 수신기를 차고 경기에 임했다.
벤자민은 2022년 미국프로야구 트리플A 시절 피치컴을 써본 경험이 있었다. 이날 경기를 치른 네 팀 가운데 KT만 유일하게 피치컴을 활용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키움 타선을 6⅓이닝 104구 5피안타(1홈런) 5탈삼진 1실점으로 틀어막고 시즌 8승(4패)째를 따냈다.
벤자민은 경기 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2022년에 썼던 거라 편하게 사용했다. 덕분에 오늘 투구 템포를 빠르게 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됐다”며 “포수 장성우가 장난으로 너클볼 던지라고 눌러서 웃기도 했다. 7회에는 음량이 너무 커 타자가 들을 것 같아 볼륨을 조절했다. 외국인 선수를 위해 영어 버전도 있다”고 설명했다.
벤자민의 피치컴 예찬론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포수가 미리 사인을 알려주니까 더 빨리 준비할 수 있고 타자의 시간을 뺏을 수 있다”며 “타자 입장에선 생각할 시간이 없다 보니 그만큼 불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에 있을 때는 2루주자가 사인을 훔치는 게 많았다”며 “한국에서는 얼마나 사인 훔치기가 많은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자한테 신경 안 쓰고 타자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 앞으로 많은 팀이 쓸 거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피치컴은 2017년 미국프로야구(MLB)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사인 훔치기 파문 이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2022시즌부터 도입됐다.특히 투수의 투구 시간을 제한하는 ‘피치클록’이 도입된 이후에는 피치컴의 사용은 필수가 된 상태다.
KBO는 ‘피치컴은 경기 중 수비팀의 원활한 사인 교환을 가능케 해, 경기 시간 단축 등 팬들의 쾌적한 경기 관람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도 피치컴 효과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다.
다만 피치컴이 당장 모든 구단이 사용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전망이다. 벤자민의 경우 미국에서 사용해본 경험이 있지만 국내 선수들은 여전히 생소한 기계다. 스프링캠프면 모를까 한 경기 한 경기가 살얼음판인 시즌 도중 뭔가를 바꾸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스프링캠프 때 미국에서 경험해보긴 했지만 훈련과 실전은 다르다”며 “일단은 훈련 때 사용해보고 선수들이 괜찮다고 하면 그때부터 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승엽 두산베어스 감독은 조금 더 부정적이다. 그는 “나는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투수들이 원한다면 당연히 사용하게 해주겠지만 개인적으로 지금은 할 시기가 아닌 것 같다”며 “당장 올해부터 쓰다가 허둥지둥하고 사인 실수가 나면 안된다”고 말했다. 김태형 롯데자이언츠 감독 역시 “당장 경기에서 피치컴을 쓰게 된다면 혼동이 올 것 같다”며 “피치컴을 쓴다고 시간이 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전통적인 손가락 사인 대신 기계로 사인을 주고받는 모습은 야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과연 새로 도입된 피치컴이 프로야구를 얼마나 바꿔놓을지 흥미롭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