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克日비타민]'불황에도 세계3위' 일본 넘으려면...

  • 등록 2015-08-10 오후 8:00:20

    수정 2015-08-10 오후 8:00:20

[세종=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1980년대 제5공화국은 ‘반일(反日)’ 대신 ‘극일(克日)’을 내걸었다. 과거에 집착해 일본을 반대하기보다는 일본을 넘어서는 나라를 만들자는 목표였다. 이 때부터 한국의 추격은 거침이 없었다. 주요 분야에서 일본을 무섭게 따라잡았다. 때마침 일본은 1990년대 디플레이션에 진입하며 성장세가 멈췄다. 한국은 2000년대 들어 과거 일본의 텃밭이던 반도체, 조선, 철강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 진입하기 직전인 1994년 국내총생산(GDP) 4조8500억달러를 기록했다. 한국 GDP 4587억달러보다 10배 넘게 많았다. 20년이 지난 2014년 GDP는 일본이 4조7698억달러, 한국이 1조4495억달러로 3배 정도로 격차가 좁혀졌다. 일본의 GDP가 20년째 제자리인 데 비해 한국은 5배 넘게 커졌다.

그러나 이 지표를 거꾸로 보면 일본이 만만치 않는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장기간 경기침체를 겪으면서도 전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저력을 바탕으로 일본은 다시 일어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아베노믹스’에 힘입은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반면 한국은 90년대 일본과 유사한 경기흐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분기까지 5개 분기 연속 0%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쉴새없이 달려오며 가까스로 좁혀놓은 한일 경제 격차가 다시 벌어질 상태에 놓였다. 극일을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이 남았다.

직시해야 할 한국 경제의 현주소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월 한 토론회에서 “국민이 아직도 과거 고도성장기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이젠 그런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최 부총리의 발언은 경제 수장으로서 적절치 못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공감했다.

실제로 한국의 GDP 성장률은 1970년대 평균 10.5%를 정점으로 1980년대 8.8%, 1990년대 7.1%, 2000년대 4.7%로 계속 하락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의 평균 성장률은 3.8%에 불과하다. 올해는 추가경정예산(추경)까지 편성하고도 3%대에 못 미칠 것으로 전망이 많다.

성장률 둔화는 단기적인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보여주는 잠재성장률은 2011년 4%대에서 지금은 3%선으로 급속히 떨어졌다. 물가상승률은 연간 3%대에서 2%대로 급락했고, 특히 최근 8개월 동안은 연속해서 0%대 상승률을 나타냈다. 잠재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하락했다는 것은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있다는 의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앞으로 10년 단위로 1%포인트씩 낮아져 2035년에는 1.5%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소득단계별 성장률 및 성장추세를 비교해 본 결과 현재 한국의 성장률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현재의 성장세 지속 가능성도 담보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일본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경우 국민소득 2만달러대에서 한국보다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장기 저성장은 지금껏 한국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의 경우 일시적인 경제 충격이었을 뿐 추세적인 침체는 아니었다. 저성장 경제는 국민은 물론 정책 당국자들에게도 익숙치 않은 길인 셈이다.

김 연구위원은 “성장추세가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0%대의 분기별 성장률이 장기화되면서 우리 경제의 저성장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며 “문제는 저성장을 당연시하는 소위 ‘저성장 불감증’이 저성장 극복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꿈틀거리는 일본

한국이 익숙치 않은 경제 상황에 직면한 반면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해 1분기 일본의 GDP 성장률은 1.0%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0.8%로 일본보다 0.2%포인트 낮았다.

일본과 한국의 성장세가 역전된 것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추진한 이른바 ‘아베노믹스’ 영향이 크다. 특히 엔저로 가격경쟁력을 높인 일본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을 밀어내고 있다. 한국의 수출 가격은 2013년과 2014년에 각각 전년 대비 1.9%, 2.2% 하락했다. 일본은 2013년 9.2%, 2014년 4.0%로 더 큰 폭으로 떨어졌다. 그만큼 한국의 경쟁력이 저하됐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의 수출물량 증가세는 2012년 이후 지속적으로 둔화되고 있지만, 일본은 2015년 들어 회복세를 나타내고 있다. 올해 1~4월 한국의 수출물량 증가율은 2.3%, 일본의 수출물량 증가율은 3.2%였다. 이 지표에서 일본이 한국을 추월한 것은 5년 만에 처음이다.

수출 둔화는 한국의 효자 품목인 자동차에서 확인된다. 자동차 수출 실적은 2012년 317만대, 2013년 309만대, 2014년 306만대로 점점 감소했다. 이에 비해 일본 자동차업체들의 수출은 가격 쟁력 회복에 힘입어 2년 연속 감소 추세에서 벗어나 증가세로 돌아섰다. 자동차 산업은 철강, 유리, 화학, 기계, 전자제품 등 수많은 관련 산업에서 생산된 2만여 개의 부품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한국 수출경쟁력 저하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수출 둔화는 수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 경제의 성장세 회복 전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백다미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자동차 등 수송 산업에서 한국의 수출 경쟁력이 악화해 일본보다 수출이 위축되고 있다”면서 “외환 시장의 급격한 변동과 엔저 현상 장기화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갈 길 멀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성장세 역전으로 ‘극일’은 다시 요원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격차를 다시 좁히기 위해선 규제개혁과 노동개혁이 필수적이란 분석이 나온다. 박근혜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일치한다.

김 연구위원은 “신성장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각종 규제 철폐 및 진입장벽이 해소가 수반돼야 하며, 이는 관련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하고 물적·인적 자본 확충을 통해 성장능력 확대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경로를 구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등 신성장동력화는 고학력 청년층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청년 실업문제의 해소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회상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수출 주력품목인 자동차산업을 예로 들며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사의 협력을 통한 노동시장과 임금제도의 유연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인당 GDP 기준으로는 5년 후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다만 양국의 실질 성장률 격차가 3%포인트를 유지하고, 물가상승률이 1%포인트 정도를 유지한다는 전제에서다. 여기에 최근 엔저 양상을 고려하면 2020년 한국의 1인당 GDP가 4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일본에 근접하거나 추월한다는 설명이다.

물론 저성장 기조에서 환율 요인에 힘입어 일본을 추월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구조개혁과 노동개혁을 통해 경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1인당 GDP가 일본을 추월한다는 것은 60년대 이후 일본식 모델을 모방하면서 성장해온 우리에게는 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것이 수치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게 하려면 내수 성장의 도모를 통한 분배 개선, 신성장 동력 발굴을 통한 성장세 유지 노력 역시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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