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리에 한국에 들어온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은 총재와 마주 앉았다.
강 부총리가 한국의 외환보유고 현황을 브리핑하고, IMF의 지원 가능성을 타진했다. 환율변동제한폭 확대를 골자로 하는 금융시장안정대책이 곧 발표될 것이라는 내용도 언급됐다.
◇ “은행 2곳, 종금사 12곳 폐쇄시켜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캉드쉬 총재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지원하면 되겠습니까?”
“최소한 300억달러는 돼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제규모라면 그 정도 돈은 있어야겠지요.”
300억달러 규모 IMF 구제금융 방안은 이렇게 가닥을 잡았다.
이날 회의에서 양측은 자금지원 규모 외에 몇가지 추가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게 된다. 잠정 합의된 사항은 “▲11월19일 한국 정부가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신청하고, ▲IMF는 구제금융 신청 다음날인 20일 실사단 1진을 한국에 파견하며, ▲300억달러 중 1차분은 연내에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논의가 마무리될 즈음 캉드쉬 총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요?”
“대통령 당선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당시는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등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선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경식 총재가 답하자 캉드쉬는 “그러면 후보들의 동의서라도 받아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다.
차기 정권을 잡을 지도자로 부터 IMF 요구사항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확약을 분명히 받아 두겠다는게 캉드쉬의 계산이었다. 강 부총리나 이 총재나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캉드쉬 총재가 돌아간 후 구체적인 지원조건을 놓고 한국 정부와 IMF간의 실무협상이 진행됐다. 협상이 막바지에 달할 즈음 IMF측이 새로운 부속합의서를 들고 나왔다. “서울, 제일은행 등 2개 시중은행과 12개 종합금융사를 즉각 폐쇄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대표단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IMF는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비밀리에 방한한 립튼 미 재무차관이 IMF 협상단을 막후에서 진두지휘하기 시작하면서 IMF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졌다. 당장 사정이 급한 한국 대표단은 저자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9개 종금사를 영업정지시키고, 2개 은행 처리는 6개월의 여유를 두고 추진한다’는 선에서 막판 합의를 보게 된다.
밀고 당기는 협상을 거쳐 12월3일 마침내 “IMF 대기성차관에 관한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이로부터 이틀 후 IMF 1차 지원금 56억달러가 국내에 입금된다. 두고두고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IMF 경제신탁통치’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 "전쟁터에서 장수를 바꾸다"...강 부총리 경질
97년 당시 상황에 대한 정부의 대처방식과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상황이 국가부도에 이를 정도의 중차대한 지경이었음에 불구하고 대통령과 경제부총리 사이에 충분한 정보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김 대통령은 강 부총리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강 부총리는 97년 9월부터 “열린 경제로 가기 위한 국가과제”라는 제목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국경제는 펀더멘털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게 강연의 요지였다.
하지만 10월중순 이후 예정된 강연은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한가한 소리 좀 그만하라”며 김 대통령이 중간에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
이 무렵 부터 김 대통령은 강 부총리 보다는 이경식 한은 총재나 홍재형 전 장관 등 다른 루트를 통해 경제상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한은 등 일부 기관에는 "재경부 지시를 받지 말고 내 지시만 받으라"며 엄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김 대통령이 강 부총리를 어느 정도 불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결국 11월19일 강 부총리를 전격 경질한다. 후임에는 임창렬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이 임명됐다. 강 부총리는 밤샘 작업을 해가며 마련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보고하기 위해 19일 오전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으나 “이제 그만 쉬라”는 대통령의 통고를 받고 돌아서야만 했다.
이유야 어쨌든 IMF 구제금융 협의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 경제사령탑이 교체됨에 따라 적지 않은 혼선이 빚어지게 된다. IMF 구제금융 신청사실 공표가 예정보다 이틀이나 늦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일 취임한 임창렬 신임 부총리는 이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캉드쉬 총재와 합의한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IMF에 지원을 요청할 계획은 없느냐”고 묻자 “우방국들이 지원해주기만 하면 IMF 도움 없이도 해결이 가능하다”며 엉뚱한 답을 내놓기 까지 했다.
재경원 실무진들은 당황했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워 한 것은 미국과 IMF측이었다. 워싱턴에서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출국준비를 하던 IMF 실사단 3명은 다시 짐을 풀어야만 했다.
다음날 오전 예정에 없던 루빈 미 재무장관의 성명이 튀어 나왔다.
“한국이 현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금융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신속하게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꾸물대지 말고 빨리 IMF에 지원을 요청하라는 암묵적인 요구였다.
그렇다면 임 부총리는 왜 캉드쉬와 합의한 IMF행을 19일 발표하지 않았던 것일까?
임 부총리는 후일 이에 대해 “IMF행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날 발표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부총리에 임명된 당일 곧바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업무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IMF 지원여부에 따라 하루에 수억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실책이었다. 외환대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정부의 정책집행시스템이 사실상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임 부총리는 세부사항을 다시 보고받은 후 결국 합의한 날짜보다 이틀 늦은 21일 밤 IMF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대외에 공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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