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이던 지난 1962년 행정고시에서 최연소로 합격해 경제기획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1년 동력자원부 장관, 1996년 노동부 장관에 이어 1998년 기획예산위원회 위원장, 1999년 기획예산처 장관을 거쳐 지난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장관 행진`을 이었다. 2001년에는 부총리로 승격되면서 명실상부한 경제관료 최고위직을 꿰찼다.
장관직업을 연달아하던 도중에는 기아그룹 회장직까지 맡아 `타고난 CEO 팔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보름전 서울 시내의 어느 추어탕집에서 만난 진 전 부총리는 옛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체구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는 여전히 기자를 압도했다.
그러나 천하의 진념도 표정 한 켠에 비친 그림자를 지우지는 못했다.
인생 풍파의 흔적.
진념 전 부총리의 비운은 국민의 정부 말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나서면서부터 시작됐다. 출전(出戰)을 극구 거부하기를 거듭했지만, 결국에는 부총리직을 내놓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떠밀리듯 뛰어들었다. `전북 보은론`이 당시에 파다했다.
전남 사람들의 희생으로 세운 정권에서 전북 인사들이 과실을 누렸으니 이번에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전혀 연고가 없던 경기도에서 난생 처음으로 마지못해 나선 진 부총리로서는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궁지에 몰려 있는 그에게 `카드대란은 진념 탓`이라는 굴레도 씌워졌다.
전매특허대로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소줏잔을 돌리던중 카드대란 책임론이 안주로 오르자 진 전 부총리의 그림자는 분노로 변했다.
"그게 어찌 내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는 12월에 큰 아들 장가 보낸다"고 했다.
여전한 그의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았다. 한국은행을 다니다 그만두고 미국 하버드 유학을 한 뒤 영국의 좋은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진강씨 얘기다. 주변사람들은 맏이에 대한 그의 믿음과 애정이 각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런 큰아들까지 잃었다.
지난 일요일 불의의 사고로 자신을 앞선 맏이를 데리러 그는 런던행 비행에 올랐다. 눈이 멀 지경의 고통(喪明之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