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 근처에 이르렀을 땐 해야할 일이 더욱 많아진다. 배를 항구에 대려면 이리저리 방향을 잡아주고 속도를 조절하는 예인선의 도움이 필수적이듯 정책기획국은 통화정책의 방향과 속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예인선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정희전 정책기획국장(55·사진)은 예인선의 움직임을 책임지는 파일럿(도선사)과 비슷하다.
무심코 던진 말이 통화정책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게 그의 자리다보니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예컨대 정부가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 등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을 때 그에게 한은의 입장을 물어보면 "얘기할 만한 게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기자 입장에서 볼 때 정 국장은 기사거리 대신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사람이다. 명쾌하게 해답을 내놓는 일이 드물다. 가령 금리인상이 서민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겠냐고 물으면 그는 `예, 아니오` 대신 "어떤 보고서를 보니 전체부채의 70%를 소득상위 40%계층이 갖고 있다더라"며 에둘러 대답한다. 현상은 설명하되 그에 대한 판단은 상대에게 넘기는 식이다.
금통위원들은 정 국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 금통위원은 "차분하고 신선하다"고 했다. 차분하다는 건 정 국장의 성격을, 신선하다는 건 그가 가져오는 보고서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 금통위원은 "우리가 어떤 것을 고민하면 좋을지 보고서를 만들어 가져오는데, 신선한 분석이 많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그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고, 도움이 많이 된다"고 덧붙였다.
정 국장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는 `파동(cycle)`을 중시한다. 경기가 `회복→확장→후퇴→침체` 국면을 보이듯 통화정책도 일종의 주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언제가 변곡점인지 판단하는 일이다. 평상시 통화정책은 부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변곡점를 그냥 지나치면 배가 산으로 간다. 따라서 배의 기수를 언제 돌려야할지 머릿속에 담았다가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정 국장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좌표론자라 할 수 있는 이성태 전 총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전 총재가 파도가 높아도 `뚫고` 가는 쪽이라면, 정 국장은 파도를 `타고` 가는 쪽을 선호한다고 할까. 정 국장은 이 전 총재 시절에도 정책기획국을 이끌었다.
다만 김 총재가 "경제는 동태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변화`에 민감해야지 `레벨(수준)`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인 것과 달리 정 국장은 변화 못지 않게 레벨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가계부채의 경우 워낙 높은 수준에서 장기간 유지되다보니 경제주체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게 정 국장의 생각이다.
현재 정 국장에게 던져진 숙제는 어떤 식으로 파도를 타고넘을지 해법을 찾는 일이다. 하반기 들어 세계경제의 더블딥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다시 커진 가운데 우리나라도 경기회복 속도가 둔화돼 기준금리 정상화의 명분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어제(30일) 발표된 8월 산업활동동향에서도 현재의 경기상황을 보여주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8개월만에 하락했다.
게다가 지난달 시장의 예상과 달리 기준금리를 동결한 까닭에 한은은 자의든 타의든 신뢰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달에도 금리를 동결하면 `통화정책이 실기(失期)했다`는 비판이 나올 것은 뻔한 일. 뒤이어 열리는 국정감사에서 또한번 코너에 몰리면 한은은 신뢰성과 정책 일관성 측면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정 국장의 행보가 주목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이런 문제가 계속되자 한은은 RP 입찰에서 낙찰규모를 줄이고 과도하게 응찰하는 금융기관에 관련 자료제출을 요구하는 등 금융시장의 고삐를 죄기도 했다. 이 때 한은 금융시장국을 이끌던 사람이 정 국장이다. 워낙 금융시장 변동성이 컸기 때문에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 가릴 순 없어도 적어도 한은이 금융시장의 변덕(fads)과 투기적 버블(speculative bubbles)에는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앨런 블라인더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얘기를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 연준 부의장을 지낸 블라인더 교수는 한때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을 대신할 가장 유력한 인사였다. 그는 `중앙은행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중앙은행인에게 시장을 무시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또한 시장을 무시하려 해서도 안됩니다.(중략) 내 말씀의 요지는, 시장이 기대하는 - 아니 실제로는 시장이 요구하는 - 정책을 그대로 허락하다보면 아주 어설픈 정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은 안팎에서 통화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진 지금, 정 국장이 꺼낼 반전 카드는 뭘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