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디 진한 남도의 국물… 속 풀리네

전주 ''현대옥'' 콩나물국밥
  • 등록 2008-05-29 오후 12:10:00

    수정 2008-05-29 오후 12:10:00

[조선일보 제공] 전주에 들를 때마다 맛있다는 콩나물국밥집을 여러 집 가보았으나, 남부시장 안에 있는 '원조' 중 하나인 '현대옥'을 못 가 봐서 서울에 오는 날 작심하고 찾아갔다.

시장 골목 안에 있는 현대옥은 십여 명쯤 끼어 앉을 좁은 식당이다. 일본 우동집 비슷하게 카운터에 둘러앉게 되어있는데, 카운터 안쪽에서 할머니와 아주머니 하나가 열심히 국밥을 말아내고 있었다.

카운터는 최근에 함석 따위로 덧씌운 듯 비교적 깨끗했다. 그러나 시장 골목 안 해장국집 풍경이라는 것이 대충 거기서 거기다. 만석이라 좁은 골목 안에서 이제나 저제나 자리가 나나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이나 국밥을 말아주는 할머니나 안에서 먹는 손님이나 아무 말이 없다. 참 묘한 분위기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고 있는 듯한 경건한 조용함. 더구나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은 옆구리에 검은 브리프케이스 같은 걸 하나씩 끼고 있다. 시장에서 갓 구어 파는 바삭바삭한 통김. 이걸 한 묶음씩 옆에 끼고 때로는 한 장씩 꺼내 먹어가며 기다리는 것이다. '저건 어디서 나누어 주는 것인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그거 어디서 나누어 주느냐"고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었다.

30여 분 기다리는 사이 자리가 났다. 국밥 한 그릇 후다닥 말아주면 바로바로 먹고 나갈텐데, 왜 이렇게 손님 회전이 더딘가 하는 의문은 카운터에 앉자 곧 알게 되었다.

대개 이런 집은 내용물을 뚝배기에 담아 죽 쟁여 놓았다가 주문 들어오는 대로 국물을 부어 낸다. 그런데 이 집은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그때부터 뚝배기에 밥 퍼 담고, 뜨거운 국물을 부어 몇 번 토렴한 다음, 토핑을 얹어 낸다.

그런데 이 토핑이란 것이 만만찮다. 할머니가 "맵게 해 드려요?" 물어보길래 "좀 덜 맵게" 하고 부탁을 했다. 할머니는 방석만한 통나무 도마에 굵은 청양고추 두 개와 족히 30㎝는 될 대파를 썰어놓고, 튼실한 마늘 세 쪽을 식칼 손잡이 밑동으로 다진다. 다진 양념을 손으로 집으니 어른 주먹만큼의 분량. 그게 뚝배기 한 그릇에 들어가는 분량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으레 뒤에 끓고 있는 솥으로 들어가려니 했는데, 방금 토렴한 국밥에 얹어 주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아줌마는 뚝배기에 밥 담고 먹은 그릇 치우는 담당이고, 할머니는 토핑을 얹어 최종적 맛을 내고 손님에게 서빙하는 마스터 주방장 같은 구조다.

"김은요?" 하고 물어보자 할머니는 칼질을 멈추더니 아무 소리 없이 도마를 내려다봤다. 일순 식당 전체가 조용해진다. 뭔가 큰 일이 난 것이라 직감적으로 알았다. 잠깐, 그러나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무안한 정적이었다. 조금 뒤 할머니가 남의 얘기 하듯 아줌마에게 "이 손님 김 없단다" 한다. 아줌마가 난감한 얼굴로 손바닥만한 셀룰로이드 팩에 든 인스턴트 김 두 개를 홱 던져놓고 간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그것도 감히 이 집에서 물어보진 못하고-콩나물국밥에 찢어 넣어 먹는 김은 시장 어귀에서 각자가 알아서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원래 콩나물국밥 먹을 땐 수란(달걀 반숙)이 덤으로 나온다. 이게 아침 일찍 커피를 주문하면 달걀을 하나씩 띄워주던 옛날 다방의 모닝커피를 생각나게 한다. 어쨌거나 다른 콩나물국밥집은 국밥이 나올 때 수란을 같이 내어주는데, 이 집은 수란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옆 사람은 수란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또 참지 못하고 "수란은요?" 하고 물었다.

할머니의 칼질이 다시 멈추고 도마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번엔 좀 길다. 그리고 식당 안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싸~한 분위기의 어색한 순간이 조금 지나고, 할머니가 거의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기다리면 나옵니다" 한다. 촐싹거리지 말고 주는 대로 먹어라 하는 분위기다. 수란 역시 먼저 만들어 놓는 게 아니라 국밥 말기 시작하면서 따로 달걀 두 개를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넣어 뒤에 있는 큰 솥에서 중탕을 한다. 그러니까 이 집의 수란은 국밥을 중간쯤 먹었을 때 나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어렵게 얻어 먹게 된 국밥 국물을 한 숟갈 입에 넣었다. 숙취에 좋다는, 콩나물에 많이 들어있다는 아스파라긴산인가 뭔가 하는 것의 원액을 들이키는 기분이다. 노리끼리한 국물의 진하기가 찡하기까지 한데, 그 뚝배기 한 그릇에 물을 대여섯 배 부어 희석하면 보통 우리가 먹는 콩나물국 비슷하게 될 것 같은 진하기이다. 아마도 북어대가리처럼 국물을 더 진하게 우려내는 다른 재료가 들어있지 싶은데, 다른 재료의 맛은 지나치지 않고 입에서 느껴지는 건 진하디 진한 콩나물국 원액이다. 거기에 예의 그 마늘 세 쪽, 청양고추 두 개, 엄청난 양의 싱싱한 대파가 들어갔으니,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헤아릴만한 맛이다.

서울 올라올 때까지 휴게소마다 들러 양치를 해도 마늘 냄새는 그날 저녁까지 입안에 남았지만 이런 맛이 '남도'의 맛 아닐까? 술 마신 아침이면 가끔 생각이 난다. 물론 맛있게 먹으려면 전날 홍어회에 곁들여 한잔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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