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김중수 한은 총재 취임사

  • 등록 2010-04-01 오전 9:31:23

    수정 2010-04-01 오전 9:31:23

[이데일리 이학선 기자] G20 의장국 위상에 걸맞은 한국 중앙은행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나아갑시다

친애하는 한국은행 임직원 여러분,

지금 세계 각국은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해 내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국제적 정책공조에 있어서도 과거와 달리 말보다는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위기를 벗어나더라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세계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지? 위기 이후(post-crisis)의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이 국제적으로 모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는 어느 나라도 순식간에 경제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경험하였기에, 그 어느 누구도 단 한시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기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저는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총재에 임명되었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영광된 자리이나,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이 지금 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이 자리를 빌려 60년 전 설립 이후, 그리고 몇 번의 변혁을 거쳐, 한국은행의 위상을 올바로 세우는 데 헌신하신 과거 임직원 선배 여러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이루어 놓은 위상은 엄숙한 마음으로 지켜 나아갈 것입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신 전임 이성태 총재께도 감사의 말씀과 함께 앞으로도 지도편달을 아끼지 말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한국은행의 권위를 세우는 데 일조하겠다는 것을 신조로 밝힌 바 있습니다. 중앙은행은 법적으로 독립성이 보장되어 있고, 중립성, 자율성, 자주성이라는 개념으로 특징지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훼손될 수 없는 중앙은행의 가치이며, 이를 지키지 못하고서는 결코 우리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에 더하여 저는 권위를 세워 나아갈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누구나 한국은행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권위는 외부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과 의지보다는 우리의 능력배양이 전제가 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도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얻을 수 있다는 점도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친애하는 임직원 여러분,

지금 세계경제가 겪고 있는 위기는 비정상적 상태이지만, 위기극복이 위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경제는 항시 동태적으로 변화하는 속성을 가졌는데, 급속한 글로벌화와 정보화 추세로 이러한 특성이 더 뚜렷해졌습니다. 동태적일수록 위험과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정보화될수록 더 급속히 확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가 됨으로써 각 부문 간의 연계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값비싸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변화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낙오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변화를 체화하려는 노력을 배가해야 할 것입니다.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미국과 중국 간의 정책조정 노력, 일부 유럽국가의 재정위기로 대표되는 유로(Euro)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도전 극복, G20의 등장과 아시아 경제권의 부상에 따른 세계 부의 재편 영향, 경제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통제하려는 금융시스템의 정비, 국제금융기구의 역할 재정립 등이 새로운 경제체제의 모습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국내문제도 이러한 과제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적절한 해답이 나올 것입니다. 아쉽게도 우리의 앞날을 제시해 줄 교과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경제에 대한 과거의 이해만을 바탕으로 접근을 한다면 올바른 처방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파악을 위해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 현명하게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 형국입니다. 지금 국제적 공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개방된 경제에서 일국의 특정정책의 효과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각국이 서로 협력하는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정책방향의 제시로 인해 시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제거해 주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은행법에 명시되어 있는 정부정책과의 조화, 공공성, 투명성이라는 특성들도 정보의 비대칭성을 줄임으로써 불확실성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은행 가족 여러분,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국제금융질서가 형성되어 가고 있으며 G20 의장국에 걸맞은 한국은행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중앙은행으로서의 한국은행이 추진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다음의 몇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불확실성은 물가안정의 위협요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은행은 설립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물가안정을 달성하는 데 배전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경제정책이란 한 마디로 고용과 물가의 두 개 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고용이 늘지 않는 경제는 지속되기 어려운 법이며, 물가가 안정되지 않은 경제는 언제나 위기를 불러오게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물가안정은 거시경제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경제의 분배구조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특히 서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둘째,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금융안정을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물론 나라마다 중앙은행의 역할 규정은 역사적 환경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아 그 나라 경제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만,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는 각 나라의 특수성을 넘어 세계경제 공통의 문제를 중앙은행들이 정책공조를 통해 집단적으로 다루도록 변화하고 있습니다. 금융안정을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으며, 우리도 이에 부응할 수 있도록 관련되는 제반 제도와 관행을 정비해야 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금융안정을 위해서는 정부 및 감독당국과의 정책협조를 긴밀히 하는 데도 적극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한국은행과 시장간의 소통이 원활해야 합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의도와 결과가 종종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좋은 의도의 정책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조차 있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주체들의 사고와 행동은 사실보다는 사실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실과 인식의 갭을 적절하게 메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입니다. 중앙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을 포함하여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시의적절하게 정보를 제공하여야 하며 경제주체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전달과정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넷째,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의 조사・연구 역량을 한 단계 더 높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행의 연구결과가 통화정책에는 물론 정부의 정책결정에도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우리의 분석능력을 격상시켜야 할 것입니다. 중앙은행이 얼마나 훌륭한 정보의 보고인가에 따라 그 나라의 정책의 질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한국은행 임직원 여러분,

우리는 OECD국가들 중에서 경제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하고 있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강조합니다만 한국은행의 기여도 컸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한편, 조속한 회복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만 우리가 이것에 도취해 있을 여유는 없다는 점도 미리 밝히고자 합니다. 우리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였을 당시 그 어느 나라보다도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008년 하반기, 위기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왜 세계경제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나라 중의 하나, 즉 연율로 20%가 넘는 마이너스 성장을 한 나라였는가에 대해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경제의 취약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나요? OECD국가들은 성장잠재력이 훼손된 것에 대해 분석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잠재 능력은 건재한가요? 위기는 언제나 고통을 수반합니다만,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는(don't waste a crisis) 말에서 처럼 위기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값진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위기는 재발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일상적인 관행을 반복(business as usual)한다면 이는 위기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 이전에 비해 사고와 관행 그리고 조직운영에서 무엇이 달라졌나요?

중앙은행에 대한 기대와 그 역할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판단합니다. 출구전략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입하였던 각종의 비상 지원책을 정상화하는 것입니다. 대내외 경제 환경의 변화에 유의하면서 최적의 방안을 모색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시장이 이에 부응하도록 주도면밀하게 조치를 취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편 중앙은행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고민도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고민이 종국적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방안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쟁자는 내부와 국내에도 물론 있지만, 미국・유럽・일본・중국・영국 등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이 진정한 우리의 경쟁자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들이 자국의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에 우리가 뒤져서는 우리의 책무를 다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앙은행의 국제경쟁력의 잣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각국의 중앙은행에서 여러분들의 경쟁 상대자가 누구인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기를 바랍니다. 말할 나위 없이 이들과의 협력을 확대하는 노력도 더욱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과거지향적・내부지향적으로부터 미래지향적・글로벌경제지향적으로 우리의 사고와 행태가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총재로서 여러분들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으며 조직에 대한 자부심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인재가 모인 중앙은행이 우리나라 경제문제에 대한 해결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자리를 경험했습니다. 모두가 총재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한 주춧돌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중앙은행에 근무하는 우리 모두는 시대적 소명의식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경제적 국경이 사라지고 있는 글로벌시대에서는 그동안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반경을 제한해 왔던 벽들을 과감하게 허물어야 합니다. 과거의 이념이나 이론에 사로잡히지 말고 우리의 지혜를 한 데 모아 새로운 도전을 용기 있게 그리고 슬기롭게 극복해 나아갑시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변화도 남으로부터 강요받는 것은 결코 효과를 내지 못하고, 그 이니셔티브가 내부에서 나와야 성공하는 법입니다. 지금 국격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가치관 변화가 필요합니다. 특히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은행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드높인다면 이것이 바로 국격 제고에 크게 기여하는 길일 것입니다. G20 의장국이 된 나라의 중앙은행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창립 60주년의 해에 세계로 뻗어 나아가는 한국 중앙은행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간다는 각오를 다지며, 먼 훗날 국가발전의 초석을 쌓은 중앙은행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 다 함께 손을 잡고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2010년 4월 1일

총재 김 중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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