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인터뷰] "선비정신으로 물질만능·이기주의 극복해야"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30년 공직 퇴임 후 '퇴계 이황'과 인생이모작
배려·섬김의 선비정신이 선진국 도약 주춧돌
리더부터 모범…'군자무본' 새해 화두로 제시
  • 등록 2016-01-01 오전 6:15:00

    수정 2016-01-01 오전 6:15:00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가진 이데일리와의 신년인터뷰에서 “혼탁한 시대의 해법을 배려와 섬김의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안동(경북)=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역사에 어려움이 없던 시대는 없다. 100세 시대라는 걸 고려하면 젊은 세대는 인생 여정의 겨우 20~30%를 보냈을 뿐이다. 청춘이 겪는 고통이 안타깝다. 도움을 못 줘서 무기력증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흙수저 출신이라도 꿈을 이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희망의 끈을 꽉 쥐게 만드는 건 나이 든 사람의 의무다. 기성세대가 모범적인 삶을 보여줄 때 젊은 세대가 희망을 가지고 따라온다. 가정·학교·회사·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자가 바뀌어야 한다. 새해에는 ‘군자무본’(君子務本)을 실천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원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선비정신’ 전도사다. ‘선비처럼’ ‘퇴계처럼’ 등을 펴냈다. 30여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인문정신의 수도 경북 안동에 머무르며 21세기 대한민국에 왜 선비정신이 필요한가를 설파하고 있다. 2016년 병신년을 맞아 김 원장은 ‘군자무본’이란 화두를 꺼내 들었다. 새해를 맞아 대한민국이 재도약하고 국운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급할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원장을 지난 12월 23일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만났다.

◇“공직 30여년 심신 피곤…퇴계 공부”

김 원장은 2005년 퇴직 이후 경북 안동에 자리잡았다. 소위 말하는 물 좋은 자리에 갈 수도 있었지만 모두 마다했다. 그의 인생 이모작의 화두는 퇴계 이황이었다. 김 원장은 “공직을 마칠 때쯤 심신이 피곤했다.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운동하면서 보냈으면 했다”며 “한문서당에 등록한 뒤 3년 동안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대학·논어·맹자·중용은 두 번 정도 본 것 같다. 건강을 위해선 마라톤을 시작했는데 풀코스를 12번 완주하고 울트라 마라톤에도 도전했다”고 밝혔다.

특히 퇴계를 흠모한 덕에 한학공부는 자연스럽게 도산서원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서울과 안동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2008년 이후부터는 도산사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으로, 지난해 4월 이후에는 도산서원 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안동 생활은 나쁘지 않다. 김 원장은 “도시의 혼탁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청정하고 맑은 곳에서 지낸다는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가진 이데일리와의 신년인터뷰에서 “혼탁한 시대의 해법을 배려와 섬김의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배려와 섬김의 선비정신이 최고의 가치”

인터뷰 내내 김 원장은 선비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로 현시대를 살아가자고 강조했다. 과연 선비정신이란 무엇일까. 김 원장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데도 왜 불행하다고 느끼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배는 부르고 편리한 생활이지만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지금 이대로 둘 수 없다”며 “이를 고치려면 근본 원인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 돈이 최고라는 물질만능주의다. 그 해법을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비정신의 정수로는 퇴계를 꼽았다. 퇴계는 일상생활에서 섬김과 배려의 리더십을 잘 보여줬다. “한양에서 아이를 낳은 퇴계의 손주가 아내 젖이 모자라니 막 아기를 낳은 안동집 여종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퇴계는 증손자를 끔찍이 여겼지만 내 자식 살리려고 남의 자식을 희생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대장장이 배순의 일화도 좋은 사례다. 천민이던 배순이 글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하고 제자로 맞았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 원장은 “퇴계가 아니었다면 배순은 ‘천민 주제에 글을 배우려 한다’며 매를 맞고 쫓겨났을 것”이라면서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퇴계처럼 주변사람이나 후배를 보듬어줬다면 어땠을까. 퇴계처럼 살면 이 시대에 무슨 흉악범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퇴계가 갑질논란이 만연한 가운데 무수한 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가진 이데일리와의 신년인터뷰에서 “혼탁한 시대의 해법을 배려와 섬김의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선비정신, 일제 거치며 단점만 부각”

선비정신은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하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게 21세기 최첨단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대주의, 당파성, 남녀·적서·반상·문무차별 등 선비정신의 단점만 지나치게 부각했다”고 설명했다. “문화후진국이던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 문화선진국인 조선의 리더였던 선비를 폄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선비정신의 장점을 적극 활용할 때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치욕적인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이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신분차별이 없는 헌법을 만들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해 세계 10위권의 방위력을 갖췄다. 또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경제부흥은 사농공상 중 ‘농공상’을 집중적으로 키운 것이다. 선비정신이 남긴 나쁜 유산은 대부분 땅속으로 들어갔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가진 이데일리와의 신년인터뷰에서 “혼탁한 시대의 해법을 배려와 섬김의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선진국의 격차는 경제가 아닌 정신문화”

2차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매번 선진국 문턱에서 미끄러지고 있다. 이유가 뭘까. 김 원장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의 자세가 훨씬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길은 ‘마음’이란 것이다.

“우리나라는 영국·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보다 국민소득은 낮지만 사실 구매력 지수를 비교하면 별 차이가 없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는 국민소득이 높지만 선진국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선진국의 차이는 결국 경제가 아닌 정신문화적 격차다. 이 때문에 선비정신이 필요하다. 배려와 섬김의 선비정신은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가치가 더 높다.”

따라서 “선비정신이야말로 선진국 도약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김 원장은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었다. “물질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배가 부를 때까지만 행복하다. 더 먹으면 배탈이 나고 다른 사람이 더 좋은 것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 주위 가까운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내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나를 낮추면 모든 사람이 고맙게 생각하고 도와준다는 것이 김 원장의 지론. 그런 면에서 퇴계야말로 ‘박기후인’(薄己厚人)을 가장 중시하고 실천한 사람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누구?

194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학과와 행정대학원을 거쳐 1971년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 30여년 이상 공직생활을 했다. 특히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차관, 금융통화위원, 기획예산처 장관 등 경제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5년 퇴직 후 경북 안동에 터를 잡고 선비정신 확산에 동분서주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선비정신 전문가가 됐다.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퇴계 종택 뒤편 산기슭에 위치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보내며 섬김의 리더십, 바른 인성 등 선비정신 전파에 힘쓰고 있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전경(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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