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 칼럼/빚 권하는 사회, 빚 두려워 않는 나라

  • 등록 2021-01-08 오전 6:00:00

    수정 2021-01-08 오전 6:00:00

창구 앞에 앉아 차례를 기다릴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설 때는 씁쓸하면서도 주머니를 털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20년도 더 된 외환위기 시절, 집을 사느라 빌린 대출금의 이자를 내러 회사 인근 은행을 찾을 때마다 겪은 속내는 솔직히 이랬다. 집값은 추락했는데 금리는 다락같이 올라 내야할이자가 거의 따블로 뛰었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몰아친 회사에서는 상여금이 끊긴지 오래고 동료들 표정에는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불안의 기색이 역력했다. 별 느낌 없이 따박따박 냈던 대출 이자가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고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큰 짐으로 다가왔다. ‘빚진 죄인’‘무능한 가장’이라는 단어가 실감 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1998년 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3년이 다 돼가는 2021년 1월의 한국. 가계건 기업이건 정부건 지고 있는 빚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는 얘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언론은 물론 저명한 학자와 국내외 전문가들이 경고와 우려의 메시지를 하루가 멀다하고 내놓고 있다. 배짱 두둑한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숫자 몇 가지만 들여다 봐도 우리나라의 부채 문제는 보통 일이 아니다. 개인이 진 빚은 지난해 3분기 1940조원을 넘어서며 명목GDP(국내총생산)의 101.1%를 찍었다. 1년 전보다 7.4%포인트 급상승한 수치다. 주택값이 뛰자 집을 사느라, 증시가 닳아 오르자 주식 투자를 위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당긴)대출을 늘린게 큰 원인이다. 기업이 빌린 돈은 2112.7조원에 달했다. 빚을 겁내지 않는 정부의 배포는 가계와 기업이 “저리 가라”다. 국가부채를 지난해 말 846조원까지 늘린데 이어 1000조원을 향해 뜀박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빚더미 위에 올라 있다고 해도 집값이 뛰거나 보유한 주식이 ‘황제주’ 대접을 받으며 상승 행진을 거듭하면 빚은 별 문제가 아니다. 팔아서 갚으면 빚을 갚고도 투자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다. 매달 뭉칫돈이 월급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와도 역시 빚의 무게는 솜털처럼 가볍다. 빚내는 걸 겁내 돈을 벌지 못한 이들을 ‘새가슴’이라고 놀려댈 판이다. 하지만 경제엔 자산 가격이 오르고 돈이 씽씽 돌아가는 선순환만 있는 게 아니다. 어느 한 구석에서 트러블이 생겨 ‘돈맥경화’가 발생하면 충격은 연쇄적이다. 돈줄이 막힌 기업이나 개인에게는 금융회사의 빚 독촉이 ‘빛의 속도’로 날아들고 한 순간에 부도, 신용불량, 파산 등의 낙인이 찍힐 수 있다.

러시아 속담에 “빚은 악마의 이빨을 가졌다”지만 이 이빨에 물려 앞길을 망치거나 죽을 고생을 겪은 이는 동서고금에 하나 둘이 아니다. 네덜란드가 낳은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초상화 화가로 명성을 날리며 많은 부를 쌓았지만 낭비벽과 빚더미가 그를 파산의 구렁텅이로 처박아 넣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후 “죽어라”하고 원고지와 씨름했다. 빚 때문이었다. 왕실의 사치와 낭비벽으로 살림살이에 구멍이 나 있던 프랑스가 1803년 신생국 미국에 루이지애나를 중심으로 한 214만㎢의 광활한 대지를 1500만달러에 헐값 처분한 큰 원인 중 하나도 거덜난 재정이었다.

증시가 후끈 달아오르고 집값도 오름세를 계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인 오늘의 한국 사정에 비춰 본다면 빚을 걱정하는 소리는 잠꼬대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조그만 구멍 하나로도 둑이 뚫릴 수 있듯 부채로 쌓아 올린 탑은 철옹성이 아니다. 자산 가격 급락, 경제 성장 둔화 등 충격 하나만 닥쳐도 흔들리고 단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민간 부채와 정부부채를 합쳐 약 4900조원, 국민 1인당 1억원 수준의 빚폭탄을 안고 새해가 열렸지만 필자는 ‘1998년 봄’의 암울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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