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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8년 호주 시드니의 한 백화점에서 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은 첫 눈에 ‘본차이나 커피잔’에 마음을 뺏겼다. 일반 도자기의 20배의 값에 달하는 영국산 커피잔을 본 김 회장은 “도자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바로 저 본차이나를 만드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와 앉으나 서나 본차이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에게 육영수 여사로부터 만나자는 호출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된 마음으로 한달음에 찾아간 김 회장에게 육영수 여사가 말했다.
“이 식탁 위를 보세요. 전문가이시니 모두 일본제품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이건 해외공관에서 보내온 독일제품이구요. 이제 우리 기술로 이런 제품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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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차이나를 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는 선례가 전혀 없었기 때문. 본차이나의 기본 재료가 쇠뼈인데, 꼬리부터 발까지 뼈를 끓여서 먹는 한국에서 원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김 회장은 일본에서 기술전수를 거절 당한 후 본차이나 종주국인 영국에 직접가서 기술을 배웠고 영국의 본애시를 수입해와 본격적으로 본차이나라는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생산 시설을 갖추자마자 청와대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김 회장은 청와대에 납품하기 위해 커피잔 생산에 들어갔다. 이후 영국과 기술 교류를 통해 본차이나 기술력을 더욱 높였고 한국도자기는 대통령의 식기를 납품하는 유일한 회사가 됐다.
대통령 식기의 디자인은 영부인의 취향을 반영했다. 육영수 여사는 초롱꽃으로 디자인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이순자 여사는 화려한 꽃무늬를 좋아해 화려함이 돋보이는 식기를 주문했다. 티타임을 즐기던 김옥순 여사는 특별히 찻잔 세트에 더 신경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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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기술제휴를 받았던 영국을 비롯해 로마교황청, 태국 왕실 등에서 국산 제품을 구입하고 기술 지원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외국 도자기 기업들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한국의 본차이나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온 지난 시간들이 결국 우리‘시대’의 대표 도자기를 만들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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