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유가공업계 1위를 달리며 왕 근육질 회사로 주목받았던 남양유업(매출 1위의 서울우유는 협동조합이었음)의 사장실에서 받았던 이 회사와 홍 사장에 대한 첫 느낌은 ‘촌티’가 가득했다. 서울 광교 부근 한 빌딩의 일부를 빌려 썼던 본사 사무실은 옹색했고 협소한 사장실엔 낡은 소파 외에 별다른 장식물이 보이지 않았다. 사장의 승용차도 20년이 다 된 구식 벤츠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짠물’ 경영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업계 소문은 홍 사장이 외부 인사와 잘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일도 거의 없다고 전하고 있었다. 회사와 일밖에 모르는 독한 승부사라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약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5월 초, 눈물을 보이며 많은 기자들 앞에 섰다. 회사가 발효유 ‘불가리스’의 효능을 과대 선전해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한 사과와 함께 그동안의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반성문이 이제는 회장인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발표의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20여 일 후, 이번에는 사모펀드 운용사인 한앤컴퍼니가 남양유업을 3107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는 깜짝 소식이 뒤따랐다. 거의 모든 뉴스의 말미에는 ‘갑질 경영의 말로’ ‘오너 리스크가 자초한 우량기업의 몰락’이라는 싸늘한 평가가 빠짐없이 곁들여졌다.
홍 회장의 퇴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추락하는 기업에서 나타난 공통적 위험 요인들이 잘 짜인 각본처럼 차례대로 재현된 인상을 주고 있어서다. 거꾸로 간 기업 평판, 내부 소통의 부재, 세상 변화와 달라진 소비자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한 시대착오적 전략, 과거 성공에 안주한 오너의 판단 미스 등 모든 사례가 연구 대상이다.
불도저 리더십으로 시장을 주름잡았던 홍 회장과 그의 남양유업은 소비자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 슘페터가 강조한 기업가정신의 핵심이 도전과 모험, 혁신에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남양과 홍 회장의 57년 성적표에는 합격점도 적지 않을 터다. 우유 등 유제품은 국민 건강에 빼놓을 수 없는 영양 공급원이다. ‘건강보국’의 일념으로 유제품 외길을 걸었던 한 우물 기업의 말년 스토리가 허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