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 칼럼]회장의 눈물로 끝난 57년 공든 탑

  • 등록 2021-06-11 오전 6:00:00

    수정 2021-06-11 오전 6:00:00

사용한 지 2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철제 책상 앞으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조그만 체구의 한 남성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수줍은 표정에 허스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십니까? 홍원식입니다”

1990년대 초반 유가공업계 1위를 달리며 왕 근육질 회사로 주목받았던 남양유업(매출 1위의 서울우유는 협동조합이었음)의 사장실에서 받았던 이 회사와 홍 사장에 대한 첫 느낌은 ‘촌티’가 가득했다. 서울 광교 부근 한 빌딩의 일부를 빌려 썼던 본사 사무실은 옹색했고 협소한 사장실엔 낡은 소파 외에 별다른 장식물이 보이지 않았다. 사장의 승용차도 20년이 다 된 구식 벤츠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짠물’ 경영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업계 소문은 홍 사장이 외부 인사와 잘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일도 거의 없다고 전하고 있었다. 회사와 일밖에 모르는 독한 승부사라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약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5월 초, 눈물을 보이며 많은 기자들 앞에 섰다. 회사가 발효유 ‘불가리스’의 효능을 과대 선전해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한 사과와 함께 그동안의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반성문이 이제는 회장인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발표의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20여 일 후, 이번에는 사모펀드 운용사인 한앤컴퍼니가 남양유업을 3107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는 깜짝 소식이 뒤따랐다. 거의 모든 뉴스의 말미에는 ‘갑질 경영의 말로’ ‘오너 리스크가 자초한 우량기업의 몰락’이라는 싸늘한 평가가 빠짐없이 곁들여졌다.

창업 57년 만에 창업자 가족이 모두 불명예 퇴진하고 사모펀드에 운명을 맡기게 된 남양유업의 추락은 극적이다. 임산부와 어린 아기를 둔 주부들로부터 탄탄한 신뢰와 지지를 받던 스트롱 컴퍼니가 영업직원의 밀어내기 갑질 사건(2013년)을 계기로 국민 밉상 기업으로 낙인 찍힌 것도 모자라 창업자 외손녀의 일탈과 소비자 우롱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 제 발등을 찍고 자진 퇴출 결정을 내렸으니 이보다 더한 몰락 드라마가 있을까. 50년 가까이 성장가도를 질주한 회사가 밉상으로 전락한 데 이어 시장에 급매물로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7년 남짓이었을 뿐이다.

홍 회장의 퇴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추락하는 기업에서 나타난 공통적 위험 요인들이 잘 짜인 각본처럼 차례대로 재현된 인상을 주고 있어서다. 거꾸로 간 기업 평판, 내부 소통의 부재, 세상 변화와 달라진 소비자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한 시대착오적 전략, 과거 성공에 안주한 오너의 판단 미스 등 모든 사례가 연구 대상이다.

하지만 냉정한 눈으로 본다면 남양의 퇴장이 남긴 교훈은 적지 않다. 아무리 견고한 철옹성의 기업과 조직이라도 순간의 잘못이나 실수로 시장과 소비자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 첫 번째다. 기업인에 대한 기대와 감시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엄해졌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교훈이다. 맞건, 틀리건 입소문이 단숨에 지구 끝까지라도 퍼질 수 있게 된 오늘날, 기업인은 한 발만 헛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셈이다.

불도저 리더십으로 시장을 주름잡았던 홍 회장과 그의 남양유업은 소비자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 슘페터가 강조한 기업가정신의 핵심이 도전과 모험, 혁신에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남양과 홍 회장의 57년 성적표에는 합격점도 적지 않을 터다. 우유 등 유제품은 국민 건강에 빼놓을 수 없는 영양 공급원이다. ‘건강보국’의 일념으로 유제품 외길을 걸었던 한 우물 기업의 말년 스토리가 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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