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①"우리 역사의 분기점, 신라의 삼국통일"

지상 강의: ‘WarStrategy’ 11강 신라가 대당전쟁에서 이긴 진짜 이유
장기전 유도·외교전 병행, 치밀한 전략의 승리
"합의제적 권력구조, 지방세력의 통합, 유능한 엘리트들 덕분"
  • 등록 2021-06-02 오전 5:00:00

    수정 2021-06-02 오전 5:00:00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육군, 지작사, 특전사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11강 ‘신라가 대당전쟁에서 이긴 진짜 이유’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유현욱 기자] 신라인 구진천이 개발한 쇠뇌는 화살이 1000보 거리까지 날아간다고 해서 ‘천보노(千步弩)’로 불렸다. 통상의 노들이 약 600보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었음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사거리를 자랑한다. 당나라에서도 탐낸 무기로 당나라에 끌려간 구진천은 당 황제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숨겨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당의 주력이었던 기병을 제압하기 위해 신라군이 창설한 장창당. 흔히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당나라를 무찌른 요소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위대한 생각 : 워-스트래티지’ 열한 번째 강연 ‘신라가 대당전쟁에서 이긴 진짜 이유’ 편에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많은 사람들은 무기의 힘에 기대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무기체계보다 더욱더 근원적인 측면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라가 뛰어난 군사외교 전략과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국가능력을 모두 갖춘 점을 높이 평가했다. 최 교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한국사의 변곡점, 삼국통일은 누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결전을 벌인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6년간 이어진 이 나당전쟁은 한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최 교수는 “삼국통일을 통해 한민족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면서 “단적인 예가 김, 이, 박, 최 등 성씨다. 이들 모두는 신라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삼국통일을 결정지은 나당전쟁이야말로 한국사의 큰 변곡점인 이유다.

신라는 5세기만 해도 경북 지역의 약소국에 불과했다. 진흥왕을 중심으로 6세기 팽창하기 시작했지만 곧바로 위기가 닥친다. 600년대 초반부터 백제는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함락하고 전선을 지리산에서 낙동강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고구려 역시 북쪽에서 밀고 내려온다. 급기야 백제-고구려 연합군의 당항 공격으로 신라는 국가의 존망마저 위협받는다. 대내적으로도 불안했다. 631년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켰고 647년에는 최고 귀족인 비담과 염종의 반란으로 열흘 동안 수도 경주에서 내전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런 위기를 전후해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춘추(훗날 무열왕)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맏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며 복수를 다짐한다.

김춘추와 신라의 선택은 외세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을 찾아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청하자, 선덕여왕은 이를 허락한다. 하지만 김춘추는 오히려 죽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는 고구려에 억류돼 목숨을 잃을 뻔 한다.

(그래픽=강사제공)
나당연합, 거침없이 백제, 고구려 정복했지만…

이에 김춘추는 647년 일본, 648년 당나라를 연달아 방문한다. 대야성을 빼앗긴 지 6년 만에 당태종을 만나 “백제, 고구려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그대 신라에 주어서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는 약조를 받아낸 것이다. 최 교수는 “당이 신라를 돕는 건 단순히 백제를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수당을 괴롭힌 고구려를 멸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라며 “거꾸로 보자면 당은 신라를 이용해 고구려를 멸망시킬 구상을 한 것이다. 양자(나당)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660년 당나라군 13만과 신라군 5만 총 18만 대군이 백제에 진격하자, 백제는 열흘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한다. 당은 웅진도독부, 7주51현을 설치한다. 665년 당은 김춘추의 맏아들인 문무왕과 웅진도독이 된 부여융 간 동맹을 강요한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하고 당은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신라로서는 당과 손잡고 백제, 고구려에 승리했지만 이들의 땅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당의 속셈이 한반도를 변방 식민지화하려는 것임을 알아챈 신라는 또다시 여러 고민에 빠진다. 최 교수는 “백제 자리에는 웅진도독부, 고구려 자리에는 안동도호부가 세워졌다. 이전에 백제, 고구려와 대치하던 상황과 다르지 않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 이겨야 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신라가 꺼낸 카드는 양동 작전이다. 먼저 백제 지역을 취한 후 고구려 지역을 견제해 나가는 것이다. 특히 신라는 거대한 당나라와 싸우되 전면적으로 번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당 태종의 약속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치밀한 준비 끝에 나당전쟁 치르는 신라

이런 전략 하에 신라는 669년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나선다. 우선 신혜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임명한다. 정관대서성은 승려를 모두 관장하는 벼슬이다. 최 교수는 “당시 신라의 국교는 불교였다. 이데올로기·심리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대사면령과 부채탕감책도 발표한다. 최 교수는 “사면령은 감옥에 간 사람을 풀어주는 것”이라며 “확대 해석해보자면 이들을 군인으로 쓸 수도 있다는 얘기”라고 했다.

5월에는 당에 자석을 바치고 흠순과 양도를 보내 사죄해 마음을 어루만진다. 유화책을 쓴 것이다.

최 교수는 “정말 중요한 일은 174곳의 말 목장을 배분한 것”이라며 “말은 요즘 말로 하면 기동전을 펼 수 있는 전차이자 트럭 같은 장비이다. 이건 마치 전차와 트럭을 각 지역에 보내 전쟁 준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한 것”이라고 했다.

670년 3월 오골성 전투를 시작으로 나당전쟁이 발발한다. 오골성은 압록강 위의 조그마한 성이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는 고연무의 1만 군대가 북쪽으로 진격하고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 1만명도 전장에서 합류한다. 다만 신라군 상당수 역시 668년 고구려에서 포로로 데려온 7000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최 교수는 “오골성을 공격한 대부분이 따져보면 고구려 사람”이라며 “이는 신라가 전쟁을 지원, 기획했지만 당으로부터 비난받을 여지를 줄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에 당은 670년 4월 고간-이근행을 중심으로 한 행군(기동부대)을 편성해 671년 7월 안시성, 9월 평양에 도착한다. 신라는 당군이 내려오는 동안 백제 전역을 정복하는 전격전을 펼친 후 671년 6월 신라의 행정기구인 소부리주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신라군은 671년 10월 당의 조운선 70여척을 공격하는 등 시간을 끌며 버틴다.

(그래픽=강사제공)
6년간의 장기전 승리한 신라, 한반도 손아귀에 넣어

하지만 신라는 672년 8월 석문전투에서 7명의 장수를 잃는 등 대참패를 경험한 뒤 보다 방어적인 전략으로 선회한다. 한산주 주장성(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신라 전역에 성을 증·보수하며 당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한 것.

그럼에도 당의 공세는 매서웠다. 673년 전선은 임진강 하류에 형성돼 양군은 각축전을 벌인다. 674년 소강상태에 들어섰던 전쟁은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대승하며 분위기가 바뀐다. 결국 당은 676년 2월 전선과 너무 가까웠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후퇴한다.

당나라는 676년 3월 신라군과 대치하던 병력 중 일부를 빼내 토번(티베트) 정벌군을 편성한다. 당이 신라에 한눈을 판 사이 토번이 세력을 급속도로 키웠기 때문이다. 신라는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기세가 꺾인 당군을 이기고 대당전쟁을 승리로 장식한다.

나당전쟁의 승리는 당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때로는 비굴할 정도로 머리를 숙이며 유화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사죄 외교의 결과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이런 효과적인 외교 전략이 먹혀들어 당이 전면전을 단행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신라가 전략적 지혜와 탁월한 국가운영 능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합의제적 권력구조, 지방 세력의 통합, 유능한 엘리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와 달리 다분히 권력이 분권화돼 있었다. 최 교수는 “귀족이 모이는 화백회의에서 국왕의 폐위, 계승을 결정했다는 건 그만큼 귀족의 힘이 세다는 것”이라며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휘되고 국가능력이 고양된다. 합의제 권력구조야말로 장기전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복속지역민을 신라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준 점 역시 한 몫을 했다. 최 교수는 “신라는 작은 나라로 시작해 점차 영토를 획득해나가며 성장했다. 이는 점령지역 주민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고 강조했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11강 ‘신라가 대당전쟁에서 이긴 진짜 이유’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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