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급등 여파로 국내 경제의 ‘약한 고리’인 중소기업의 취약성이 드러나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 90%는 원자재를 수입·가공한 뒤 대기업이나 해외에 판매하는 구조여서 환율에 유독 민감하다.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대기업 납품가에 반영할 배짱도, 환위험을 관리할 여력도 없어 고환율 장기화 국면에서 줄도산 우려가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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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7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2.7원 오른 1467.5원에 주간 거래를 마감했다. 같은 날 오전 장중 한때 1486.7원까지 급등하며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 16일(1488.5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세계적으로 강(强)달러 현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12·3 비상계엄이 이후 국내 불확실성이 확대된 영향이다.
중소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통상 환율 상승은 수출 기업에 호재로 여기지만 중소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국내 중소기업은 대다수 원자재를 수입해 가공한 뒤 대기업이나 해외에 판매해 수익을 낸다. 환율 상승으로 원자재 수입 비용이 늘어 환차익 효과는커녕 환차손만 늘고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대기업 납품가나 수출품 가격에 반영하기는 거래 관행상 불가능에 가깝다.
경남 창원에서 차량 전장 부품 제조기업을 운영하는 박 모씨는 “해외에서 원자재를 수입할 때는 달러로 비용을 지불하고 국내에 납품할 때는 원화로 지급받기 때문에 피해가 크다”며 “계약이 끊기는 게 두려워 국내 고객사에 납품단가 인상을 요청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매출액이 오르면 손해액은 더 늘어나기 때문에 추가 계약 문의를 받지도 못한다”며 “이렇게 가다간 도산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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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계에서는 원자재 수입 중단이나 원가 절감, 투자 축소 등의 방식으로 고환율에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의 손해를 막는 임시방편일뿐 장기적으로는 기업 경쟁력이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 역대 최대 수출에 기여한 K뷰티 역시 엔진이 꺼질까 노심초사하는 상황이다. 국내 한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는 “고환율에 따른 원자재 수급 문제가 생길 경우 태스크포스를 가동해 원료와 부자재 등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있다”면서 “원료를 수입하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생산해 내부 비용을 절감하는 방식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AI 스타트업 D사 관계자는 “오픈AI와 같이 자본력을 가진 기업이 아닌 이상 LLM 개발·운영 비용이 부담이다”며 “고환율로 인해 부담이 더 커지면서 내년에 회사 손익 구조가 많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클라우드 계약 기간을 월 단위로 줄이는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토로했다.
더 큰 문제는 고환율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년 초에는 환율이 1500원을 찍을 것이란 전망이 현실화하고 있지만 중소기업엔 이를 버텨낼 힘이 부족하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절반(49.3%)은 환 리스크를 전혀 관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천에 있는 중소 제조기업 E사는 “구리 등 주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수입 원자재 구매를 위해 정부가 공동구매를 지원하거나 조달청 비축물자를 조기에 적정한 가격으로 방출해야 한다. 환 변동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환 헤지 상품 가입이나 보험료 지원도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