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재계…제로섬·양극화에 성장판 닫히나

  • 등록 2014-02-20 오전 6:00:00

    수정 2014-02-20 오전 6:00:00

[이데일리 이재호 기자] 국내 한 대기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A 부사장은 지난해 말부터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수뇌부로부터 올해 경영지표를 개선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출 비중이 70%에 달하지만, 주요 수출 대상국의 경기가 악화하면서 물건을 내다 팔 곳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제품을 출시해도 저가 공세를 펼치는 중국 기업과 엔저 효과를 등에 업은 일본 기업들에 치여 이익을 내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는 글로벌 신용평가사가 실적 부진을 이유로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는 바람에 해외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자칫 회사가 위기를 극복할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는 A 부사장만의 고민이 아니다. 국내 기업 대부분이 비슷한 이유로 한숨을 내쉬고 있다.

◇ 신시장이 없다…기업들 ‘제로섬’ 혈투

지난 2008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견조한 실적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국 수출 호조세가 유지된 데다 동남아시아와 남미, 중동 등 신흥국을 중심으로 시장 수요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9%대에서 7%대로 떨어질 만큼 성장세 둔화가 뚜렷한 데다, 시진핑 정부가 내수를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던 신흥국들도 지난해부터 시작된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정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 국가의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국내 기업들도 판로를 확대하는데 난항을 겪게 된다.

실제로 본지가 시가총액 상위 30대 기업 중 금융·공기업·지주회사를 제외한 21곳의 올해 실적 추정치를 분석한 결과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4.65% 수준에 그쳤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매출 증가율은 각각 3.56%와 5.72%로 집계됐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 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한 만큼 중국과 신흥국에서 신규 수요가 창출되지 않으면 매출 확대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김용옥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선진국은 성장률이 낮고 신흥국의 경제 여건도 악화하고 있다”며 “파이가 커지지 않는 상황에서 경쟁을 벌이는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환율·신용리스크에 실적 ‘양극화’ 고착화 조짐

환율도 기업 실적을 좌우하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지난해 원화 강세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최근 환율 흐름은 지난해와 다소 차이가 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로 원·달러 환율이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는 인식이 강해 환율 오름세가 올해 내내 유지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환율 하락 압력을 상쇄하고 있지만 결국 원화 강세로 갈 가능성이 높다”며 연간 평균 환율로 1070원을 제시했다. 김 위원은 “엔·달러 환율도 평균 105엔 정도로 예상돼 엔화 약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해도 국내 기업들은 원화 강세와 엔저가 결합된 환리스크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신용리스크라는 새로운 변수까지 나타나 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전망이다.

무디스와 피치, 스탠더드앤푸어스(S&P) 등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는 지난해 말부터 포스코와 KT, LG전자, GS칼텍스 등 주요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내렸다. 지난해 실적이 부진했던 데다 향후 실적 개선의 여지도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실적 고공행진을 벌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신용등급이 올랐다.

결국 글로벌 수요 위축 및 환리스크에 따른 실적 부진으로 신용등급이 하락하고, 이 때문에 자금 조달과 시장 경쟁이 어려워져 실적 개선에 어려움을 겪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업 간 실적 양극화가 고착될 수 있다.

김 연구위원은 “올해 저성장이 본격화하면 다수의 대기업이 신용리스크 확대로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이익보다 법인세 증가폭 더 커 ‘이중고’

실적 분석 대상인 21개사의 올해 총 영업이익은 79조503억 원으로 지난해(73조72억 원)보다 8.27%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반해 이들 기업의 법인세비용 총액은 18조7978억 원으로 전년 대비 21.83%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법인세비용은 법인세차감전사업이익에서 당기순이익을 뺀 금액으로 기업의 이익 규모와 비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법인세비용 증가 폭이 영업이익 증가 폭을 크게 웃돈 건 기업이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이익보다 다른 부문의 이익이 많이 늘어 결과적으로 세금 납부 규모가 커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 팀장은 “법인세비용 증가율이 영업이익 증가율의 2.6배에 달한다는 것은 영업외이익이 상당히 많이 포함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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