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식 꽃다발 먹으며 버텨" 현대사 최악의 인질극 [그해 오늘]

  • 등록 2024-09-03 오전 12:01:01

    수정 2024-09-03 오전 7:45:55

[이데일리 김혜선 기자] 2004년 9월 3일(현지시간) 오후. 러시아 북오세티야에 위치한 베슬란 제1공립학교를 둘러싸고 군대와 경찰,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몰린 5000여명의 민병대가 숨을 죽인 채 포위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체첸의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테러리스트들이 이틀 전인 1일부터 어린이와 민간인을 포함한 인질 1200여명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데 인질들이 사로잡힌 베슬란 학교 체육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형 폭발이 발생했고, 이 인질극은 어린이 186명 포함해 334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현대사 최악의 인질극’이 됐다.

베슬란 참사는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 1일 체첸 반군 최소 32명이 베슬란 학교에 들이닥치며 시작됐다. 초중고 통합 학교인 베슬란 학교에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이 대거 몰렸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은 학교 점령 사흘 전부터 학교 담당 치안 경찰관들을 살해하는 등 치밀하게 테러를 준비했고,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왔던 민간인들은 고스란히 인질이 됐다.

테러리스트들은 인질을 베슬란 학교 체육관에 몰아넣고 러시아의 철수와 체첸의 독립을 요구했다. 체육관 중앙에 인질을 밀집시킨 이들은 인질을 둘러싸고 곧바로 기폭시킬 수 있는 폭약을 설치했다. 그리고 가장 큰 폭발 스위치에는 테러리스트가 올라서 그가 사망하거나 스위치를 벗어나면 곧바로 폭발하도록 만들었다. ‘데드맨 스위치’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테러리스트들은 인질들에 러시아어만 할 것을 강요하며 이러한 내용을 다른 인질들에 오세트어로 통역해준 학부모를 그 자리에서 사살하는 등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수천 명의 인질이 잡혔다는 소식이 퍼지자 인근 지역에서는 분노한 시민 5000여명이 몰려와 민병대를 꾸렸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어린이부터 죽이겠다”고 협박해 학교 진입을 할 수 없었다. 이후 테러범들은 학부모 한 명을 내보내 쪽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협상 대상자를 지정하고 “만약 우리 중 한 명이 죽으면 50명을 쏘고, 한 명이라도 부상을 입으면 20명을 죽이고, 5명이 죽으면 모든 것을 폭파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들이 보내온 쪽지에 담긴 전화번호는 한 자리가 틀려 접촉할 수 없었다.

협상이 늦어지자 테러리스트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여성 테러리스트는 어린이를 인질 삼은 것에 반대하며 아이들만이라도 풀어주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어린이를 풀어주자고 주장한 테러범은 몸에 설치된 폭탄이 터져 죽었고, 살아남은 다른 이들도 ‘배신자’로 찍혀 살해당했다. 이후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이 보낸 메모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성 21명을 총살했다.

인질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린 채 식수도 공급받지 못했다. 인질들은 새 학기를 축하하기 위해 가져온 꽃다발을 뜯어 먹기 시작했고, 일부는 갈증에 못 이겨 소변을 마셨다. 테러리스트들은 교내 모든 수도꼭지를 막아 두고 어린이들이 화장실에 갈 때도 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인질극 이틀째인 9월 2일에는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루슬란 아우셰프가 나서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당시 현장에 잡혀 있던 아네타 가디에바는 지난 1일 러시아 매체 렌타(lenta.ru)와이 인터뷰에서 “아우셰프가 학교에 도착하자 여성들이 ‘루슬란! 도와주세요. 아이들을 구해주세요’라고 외쳤다”고 회상했다. 당시 아우셰프는 협상을 통해 여성과 아이 약 20여명을 석방시켰다.

사흘째인 3일에는 극도로 탈진한 인질들이 자포자기한 상태로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나데즈다 구리예바는 폭발이 일어나기 전, 한 여성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일어나 곧바로 테러리스트에게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테러리스트는 욕설과 함께 저주를 퍼부으며 여성에 기관총을 겨눴고, 구리예바는 이 여성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여성은 그대로 자리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구리예바는 “그때는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고 렌타에 말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정체불명의 폭발이 일어나자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인질들은 폭발로 인해 벽 한쪽이 무너지자 그 사이로 뛰쳐나갔고, 테러리스트들은 인질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학교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경과 민병대도 그것을 시작으로 테러리스트들에 총격을 가하며 진입했다. 곧 몇 번의 폭발이 더 일어났고, 테러리스트들은 인질들을 창문에 세워두고 “비명을 지르고 커튼을 흔들어라”라고 시키며 군경의 학교 진입을 막으려 했다. 창문에는 격자로 된 잠금장치가 달려있어 탈출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구리예바 역시 창문에서 커튼을 흔들다 한 인질에게 창문의 격자 하나가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구리예바는 아이들부터 창문을 통해 탈출시키기 시작했고,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이 끌어안고 뛰어내리게 했다. 그때 테러리스트가 기관총을 들고 나타나 “인질을 석방시키지 마라”고 외치며 구리예바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구리예바는 다행히 총을 맞지 않고 발을 헛디뎌 창문 밖으로 떨어졌고, 그대로 군대에 구출됐다고 한다.

이후 군대가 학교에 진입해 테러리스트 소탕을 시작하자 테러리스트들은 어린이들을 자신의 방패로 삼기까지 했다. 이후 화재가 발생한 체육관이 무너지며 수백여 명의 인질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진압 과정에서 군경도 수십여 명이 사망했다.

한편, 베슬란 참사 이후에도 희생자 유족과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PTSD와 장애로 어려운 삶을 보내고 있다. 특히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수많은 피해자들이 장애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피해자는 렌타에 “우리의 분노는 자신의 힘으로 테러를 막아야 하고,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 본부를 통솔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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