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에 세운 표정없는 십대들, 그 불안하고 친밀한 동거

서울 첫 개인전 연 샹탈 조페…리만머핀서 '틴에이저스'
종잡을 수 없어 표현 더 어려운 10대 초상
딸·조카와 친구들 성장기 담은 15점 걸어
비율·원근 깨고 형상 외 디테일 거의 없어
치장없는 '단순 인물화' 거장 카츠 닮기도
  • 등록 2020-12-21 오전 3:30:01

    수정 2020-12-21 오전 3:30:01

샹탈 조페가 서울 종로구 율곡로 리만머핀 서울서 연 개인전 ‘틴에이저스’에 건 ‘알바’(2019·오른쪽)와 ‘벨라’(2020). 교복차림의 14세 소녀는 작가의 조카 ‘알바’다. 3m 높이에 “전사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십대의 에너지를 채워냈다고 했다. ‘벨라’는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앳된 얼굴이지만 얼핏 삼십대의 분위기가 풍기기도 한다. 나이를 제대로 짐작하기 어렵게 그린 작가의 의도기도 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도대체 읽어낼 수가 없다. 말간 얼굴에 눈만 크게 든 채 무념무상. 그것도 오래 가진 않는다. 때론 허무가 지나쳐 우울이 덮어버리기도 하고, 때론 발랄이 지나쳐 순진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슬쩍 스치는 표정도 변화무쌍, 그 자체다. 불안, 무시, 당당, 공격, 비밀, 변덕, 반항, 호기심 등등. 말이 모자라 표현이 안 될 뿐, 연거푸 터져나오는 버라이어티한 심리상태는 이미 분석자의 뇌 용량을 타고 넘는다. 그래. 차라리 속 편하게 ‘종잡을 수 없음’ 정도로 해두자. 무엇이 이리 복잡하냐고? ‘십대’라는 이름을 가진 저이들의 세상이 말이다.

만약 당신이라면, 손에 붓을 쥐어주고 이 전부를 묘사해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려내겠는가. 선은 어찌 내고 색은 무엇을 쓰며 질감은 또 얼마만큼 얹을 건가. 부르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겐 사랑스러운, 또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운 이런 인물군이 또 있을까.

그 어려운 일을 해낸 화가가 있다. 샹탈 조페(51). 작가는 1969년 미국에서 났다. 작품활동은 열두 살 이후 미술공부를 해왔던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해왔다. 30여회의 개인전을 런던·파리·더블린·베니스·밀라노·헬싱키 등 유럽, 뉴욕·LA 등 미국에서 주로 열었다. 2006년 로열아카데미 월라스톤 프라이즈를 수상하면서 스타작가로 부상,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영국 런던 작업실에서 모델을 앉혀두고 작업 중인 샹탈 조페(오른쪽). 작가는 캣워크를 걷는 패션모델, 포르노그래피 여배우 등을 거쳐 2000년대 초반부터 ‘십대’의 인물화를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다. 작가가 소속된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가 발행한 도록에 실린 사진을 다시 촬영했다.


그런 그이가 크고 작은 작품들을 들고 첫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 리만머핀 서울에 바로 그 사랑스럽고 부담스러운 ‘십대들의 초상’을 실어낸 거다. 전시명도 ‘틴에이저스’(Teenagers)라 했다. ‘청춘’이라기엔 너무 눌려 있고 ‘성숙’이라기엔 아직 어설픈, 딱 그 경계에 걸린 15점을 걸었다.

△패션모델→포르노여배우→십대 딸…영역없는 인물화

작가의 캔버스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일찌감치 인물로 세상스케치에 나섰던 건데, 시작이 단순치 않았다. 캣워크를 걷는 패션모델이었던 거다. 이후 엄마와 아이들을 중심에 세운 ‘가족’에 잠시 머물렀으나 이내 ‘좀더 센’ 인물로 되돌아왔다. 포르노그래피 여배우였다. 당시 그이는 “중요한 것이 사람이 아니다, 다 보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것에 더 흥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0년대 직전까지 이어진 이런 경력이 그이를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안에 가두기도 했던 모양이다. “남성보다 다채로운 여성에 집중”했을 뿐이라는데.

샹탈 조페가 그린 작은 인물화들. 높이 40∼100㎝ 크기다. 왼쪽부터 ‘속옷 차림의 벨라’(2018), ‘서 있는 비타’(2019), ‘빨간우산을 든 에스메’(2019), ‘에스메 챔피언’(2019)(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지만 그 경력이 또 한 차례의 ‘격변’을 맞는다. ‘십대’를 모델로 삼은 거다. 동기가 있단다. 2004년 태어난 딸을 바라보면서다. 그때부터 그이의 붓은 모정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나 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며 거칠 것 없이 커가는 딸과 조카, 그들의 친구들에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다이내믹한 성장기를 따라잡으면서 그이의 붓놀림도 빨라졌다.

어찌 보면 그이의 시선과 십대들의 초상은 꽤나 닮았다. 틀에 박힌 것과는 거리가 멀고, 무심한 듯 애정이 스몄으며, 연약해 보이지만 절대 허술하지 않다. 그 눈과 붓으로 그려내 서울로 공수해온 작품 대부분은 누군가의 이름이다. 딸 ‘에스메’를 앞세워 조카 ‘알바’와 친구인 ‘벨라’ ‘캐롤타’ 등, 여기에 유일하게 남자아이인 ‘프레저’까지.

샹탈 조페의 ‘프레저Ⅰ’(2020). 전시작 중 유일하게 등장하는 남자아이다. 작가의 딸 에스메와 오랜 친구 사이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중 단연 ‘알바’(2019)를 대표작으로 삼을 만하다. 3m에 달하는 캔버스는 미색 배경에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 스커트를 입은, 교복차림의 갈색머리 소녀를 단독으로 세웠다. 14세 때를 그렸다는 소녀는 “전사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에너지”로 작가에게 발탁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역시 표정은 ‘무취무향’.

2m 규모의 캔버스에 앉힌 ‘벨라’(2020)도 다르지 않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앳된 얼굴이지만 얼핏 삼십대의 분위기가 풍기기도 한다. 이중 삼중으로 덧칠한 색감이 묘한 분위기를 내는 이 작품을 발표하고 작가는 “초상의 한계를 깼다”는 평을 받았단다.

마땅히 작가의 딸은 ‘단골 모델’로 등장한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혀 정중앙에 배치한 ‘에스메’(2020), 붉고 푸른 색채감이 도드라진 ‘캐롤타와 에스메’(2020), 드물게 소품이란 것을 제대로 쥐어준 ‘빨간우산을 든 에스메’(2019) 등등.

샹탈 조페의 ‘에스메’(2020·오른쪽)와 ‘캐롤타와 에스메’(2020). ‘십대의 일상’이란 부제가 붙을 만한 작품들이다. 작가가 십대에 몰입하게 한 동기이자 이유인 딸 ‘에스메’는 마땅히 작가의 단골모델로 자주 등장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비율 깨고 원근 깨고…강렬한 잔상 남겨

화폭에 들이는 인물에 살을 붙이고, 그것이 혹여 과하다 한들 예술의 세계에서 큰 문제가 될 리 없었을 거다. 그런데도 작가는 유달리 ‘직관과 진실의 조화’에 방점을 찍었다고 했다. 인물을 그리는 화가의 고지식한 자세라고 할까.

그렇다고 극사실주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비율도 깨고 원근도 깨고, 종종 형태도 무너진다. 오랜 세월 모델들이 그저 작가의 눈에 들었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디테일도 허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십대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잡기보다 먼 발치에 세우고 스냅사진처럼 찍어낸 듯하달까.

덕분에 작품은 사건보단 일상이다. 그래서 십대로 보일만한 행동도, 얼굴도, 배경도 없다. 십대로 보여 십대라기보다 십대로 보자고 해서 십대라는 말이다. 그림 속 형상만으론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으니까. 작가가 그저 통보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바로 그 십대라니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를 의도했다면 목적한 만큼 달성한 셈이다.

샹탈 조페의 ‘벨라’(2019). 희로애락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요란스러운 치장도 없는 작가의 인물화는, 단색배경에 극도로 단순화한 인물에 집중했던 미국작가 알렉스 카츠가 자주 오버랩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화랑가에 건 그림이 처음인데도 왠지 낯설지 않은 것은 화풍 덕이 크다. ‘심플한 인물화’의 거장 알렉스 카츠(93)의 붓놀림이 보이는 까닭이다. 60여년 아내 ‘아다’를 뮤즈로 삼아 카츠는 단색배경에 극도로 단순화한 인물에 집중했더랬다. 희로애락의 표정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요란스러운 치장이 돋보이지도 않았다. 세세함을 죽인 자리에 굵고 거친 선, 숨죽여 뻗어낸 간결한 색, 쓱쓱 그어낸 붓터치가 대신 나섰다. ‘세련된 터치의 완성’인지 ‘대충 그린 무성의’인지 아직도 결론 내기에 주저하는, 하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는 수많은 컬렉터를 몰고 다니는 그 카츠가 자꾸 오버랩된다고 할까. 기어이 한 번 더 뒤돌아보게 만드는 강렬한 잔상까지도 말이다.

작품가는 대작의 경우 7만파운드(약 1억 407만원)를 부른다는 게 갤러리 측 귀띔이다. 전시는 내년 1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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