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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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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오늘

  • 도끼에 미군사망…北 8·18 판문점 도끼 만행[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 2022.08.18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졌다.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군이 유엔(UN)군 장교를 사망케 한 사건으로, 한국전쟁 휴전 이후 한반도 내 군사적 긴장감이 가장 높아졌다.북한군들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JSA 모습.(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이날 오전 JSA UN군 제3초소 앞에서 UN군 11명의 호위 아래 한국인 노무자 5명이 미루나무 가지를 쳐내고 있었다. 관측소의 시야 확보를 위해 풍성해진 나무를 자르려고 한 것이다.이때 북한군 10여 명이 나타나 이를 방해하며 대치했다. UN군은 작업을 이어나갔고 이후 20여 명의 북한군이 도끼 등의 무기를 갖추고 더 합류했다. 이들은 당시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미국군 장교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를 도끼로 살해했다. 단 4분만에 벌어진 참극이었다.미국과 한국이 발칵 뒤집혔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은 일본에서 전투기를 타고 급거 한국으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3` 발동에 합의했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3`가 발령된 것은 처음으로, 사실상 준전시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북한도 사건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면서 전시태세에 돌입했다. 미군이 먼저 도끼를 던졌다면서 적반하장으로 맞섰다.미국은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을 통해 전쟁을 준비했다. 미국 본토와 괌, 오키나와 등에서 전투기와 항공모함 등 전력을 한반도에 배치했다. 미루나무 절단 중 북한이 교전 의지를 보일 경우 JSA를 넘어 북한을 타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북한은 미국의 대규모 화력 시위에 한발뒤로 물러섰다. 미루나무 절단 자체를 지켜보기만 했으며 한국군이 북한군 초소를 공격하는데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소련과 중국 등 당시 공산권 국가도 `미국`을 넘어 `UN`을 공격한 북한과 거리를 뒀다.결국 북한은 미국에게 `비밀회담`을 요청하고 김일성이 `유감 표명` 편지를 낭독하면서 위기가 해소됐다. 북한이 항전 의지를 보이지 않은 데다 김일성이 유감을 표명하면서 미군은 작전을 종결지었다. (사진=연합뉴스)이 사건을 계기로 JSA 경비 초소는 확실한 경계를 세우고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바뀌었다. 여담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시 북한 초소를 공격했던 특전사 제1공수 특전여단 소속으로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 '8월17일' 장준하 사망…의문사와 실족사 사이[그해 오늘]
    한광범 기자 2022.08.17
    고(故) 장준하 선생. (사진=장준하기념사업회)[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75년 8월 17일. 독립운동가로서 박정희 정권 시절 군사독재 반대 투쟁을 하던 장준하 선생이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후 1944년 탈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에 입대했다. 이때 그는 강제 징집됐던 다른 동지들과 중국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을 탈영해 7개월간 무려 2500㎞를 이동해 충칭에 위치한 임시정부를 찾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장준하 선생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했다. 이승만 정권의 1공화국에서 문교부(현 교육부) 국민사상연구원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고, 4.19 혁명 이후 출범한 2공화국에서도 군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장준하 선생은 애초 5.16 군사정변에 대해 우호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군사정변 직후 사상계에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며 지지글을 쓰기도 했다.하지만 군부가 약속했던 민정 이양을 이행하지 않자 박정희 정권의 반대편에 서게 됐다. 그는 사상계 편집인으로서 박정희 정권 반대 운동을 했지만 계속되는 언론탄압에 결국 1967년 정치권에 뛰어들게 된다.장준하 선생은 국회의원 유세 도중 당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력을 언급하며 “박정희가 밀수 왕초”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그는 박정희 정권 반대 투쟁을 계속하던 1975년 8월 17일 등산을 갔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사망 원인을 실족사로 발표했지만 유족은 정권 차원의 살인이라고 주장해 여전히 사망 관련 의혹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장준하 선생의 사망 이후 유족들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취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자식들은 해외로 흩어졌다. 특히 장남 장호권(현 광복회장)씨는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진상규명을 시도하다 핍박을 받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과 2004년 조사를 진행했으나 결국 “진상 규명 불능”으로 최종 발표했고, 2010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도 조사 중지 결론을 내렸다.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8월 장준하 의문사에 대해 다시 조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 `8월16일` 호암 이병철, 전경련 전신 한국경제인협회장 취임[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 2022.08.16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61년 8월16일.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초대 회장에 올랐다. 전경련은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선도했다는 `명`과 함께 대기업의 이익 대변 단체라는 `암`의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1961년 8월 16일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당시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총회. 가운데 회의를 주재자가 초대 회장인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다.(사진=전경련)불과 석 달 전 박정희 군사정부가 5·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후 보름 여 기간 동안 박정희 군부는 경제인들은 `부정축재자`란 명목으로 잡아들였다. 이 회장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당시 부의장를 만나 `전재산 환원`을 걸고 경제인들의 석방을 요청했다.부의장에서 의장으로 올라선 박정희는 7월 14일 이들을 모두 석방했다. 다만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공장을 세우는 등 약속한 투자 조치를 이행했다.이와 함께 경제 단체 결성이 추진됐다. 기업인들은 7월 17일 경제재건촉진회라는 단체를 만든다. 그러면서 군사정부가 마련 중이던 5개년 경제계획과 관련해 기간산업 건설안을 만드는 등 정치와 경제의 시너지를 도모했다. 경제재건촉진회는 한 달 여 뒤인 8월 16일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을 바꾼다. 이 과정에서 다른 기업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초대 회장에는 당시 한국경제 최고 부호 이병철 회장이 선출됐다.단체를 구성한 경제인들은 한국 경제 살리기에 적극 나섰다.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소요되는 자금 4억2600만달러 중에 절반이 훌쩍 넘는 2억3480만달러가 민간 차관으로 끌어들인 돈이다. 해외 자본 유치의 성패를 이들이 좌지우지한 것이다.한국경제인협회은 1968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이름을 다시 바꾼다. 전경련은 울산공업단지 건설, 창원 구로수출산업공단, 사채동결 건의, 한국경영자총협회 창립, 민간금융기구 설립 등을 추진했다.다만 전경련은 대기업 영향력을 위한 입법활동을 벌이거나 대기업 그룹 총수의 경제범죄에 대해 정부의 선처를 요구하는 등 대기업의 이익을 중시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지난 2016년 이병철 회장의 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과 전경련이 연관되자 기부금 중단 및 활동 금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 `8월15일` 일제강점기 끝…3년뒤 대한민국 정부도 수립[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 2022.08.15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20세기 이후 한국인에게 8월15일은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다. 30년이 넘는 긴 일제의 치하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광복을 맞은 날이다.조선총독부 건물. 해방 후에는 미 군정이 청사로 사용했다.(사진=KMDb 영상 캡쳐)1945년 오늘 대한민국은 36년 동안의 긴 일제 통치에서 벗어났다.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한국도 자연스레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났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양력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했다. 광복절은 3·1절과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대한민국 5대 국경일이다. 북한에서도 8월15일을 `해방절`로 지정해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일본에서는 이날을 `종전기념일`이라는 이름의 기념일로 정했다.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버전을 자행하던 일본이 결국 그 계획의 마침표를 찍은 날이지만 `패전일`이 아닌 `종전일`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작명의 느낌이 강하다. 일왕이 육성으로 라디오에 나와 패전을 선언했지만 그 선언이 모호해 정작 8월15일 당일에는 해방의 분위기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범 등이 풀려난 8월16일부터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자유를 만끽했다.대한민국 정부 수립도 날짜를 맞춰 3년 뒤인 1948년 8월15일이 됐다. 다만 해방 3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1948년 8월15일 3년 동안의 미 군정이 마무리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다.1948년 5월 1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북한의 거부로 남한에서만 치러지게 됐고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 이시영 선생을 부통령으로 하는 제1공화국이 설립됐다.이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북위 38도선이 기준이 돼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됐다. 불안했던 균형은 결국 2년 뒤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이어졌다.
  • '8월14일' 여성운동가 김학순, 日위안부 만행 첫 증언[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 2022.08.14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 앞에 섰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로 고통 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고 하니 말이나 됩니까”라고 성토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1995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사진= AFP)김 할머니는 1991년 12월에는 일본으로도 건너가 자신의 피해를 증언했다. “일본 정부에서 (위안부가) 없다고만 하지 마라. 엄연히 (내가) 살아 있다.” 이 기자회견은 일본 사회에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회견장에서 일본인 남성 기자가 김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는 증언도 있다.김 할머니의 증언에 이어 미국에서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여`했음을 증명할 문서가 드러났다. 군부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던 일본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1992년 1월 29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 총리는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마음 속 깊은 사과와 반성을 한다”고 사죄했다.자신을 증인으로 내세워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고귀한 희생의 날은 201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됐다. 우리 정부도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지정해 피해자들을 위무하고 있다.김 할머니는 이후에도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전세계인이 인지하고 반성할 수 있게끔 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1991년 12월 김 할머니가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법원에 청구하면서 국제사회는 이 문제에 주목했다. 김 할머니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김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면서 수많은 피해자가 용기를 냈다. 국내는 물론 중국과 필리핀,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많은 피해 여성들이 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일본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김 할머니는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약 2000만원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있는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했다. 그리고 8일이 지난 1997년 12월 16일 세상에서의 고통을 뒤로 하고 영면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지면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부고기사를 발행했다.(사진=연합뉴스)미국 뉴욕타임스는 김 할머니의 별세 24년이 지난 지난해 `위안부 침묵을 깼다`라는 부고기사를 실어 김 할머니를 기렸다. 알렉시스 더든 코넷티컷대 역사학 교수는 김 할머니를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면서 “유엔이 일본 정부에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정의 시작이었다”라고 했다.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평생을 바친 위안부 여성운동의 정신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가수 송가인은 김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린 30주년을 맞아 `시간이 머문 자리`라는 노래를 불러 헌정했다. 이 노래는 일본인 엔카 가수 아리아가 `기억`(記憶)이란 일본어 버전으로 다시 불렀다. 전쟁의 아픔을 다음 세대가 기억하고 반복하지 않는 것, 김 할머니가 바랐을 미래의 모습이다.
  • `8월13일` 尹 대통령 취임[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13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정치인 윤보선은 유일과 최초 타이틀이 유독 많다. 충청 출신, 서울시장을 거쳤으며, 국무위원을 지내고, 퇴임 후 정계를 은퇴하지 않은 첫 대통령이다. 조선시대부터 6공화국까지를 살아낸 생애도 돋보인다. 여기에 의원내각제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윤보선 4대 대통령 초상화.(사진=대통령 기록관)4·19혁명 이후 수립한 2공화국(1960년 6월15일~1963년 12월16일)은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체제를 따랐다. 국회는 민주당 정치인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60년 8월13일 윤보선 4대 대통령 취임했다.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시장, 상공부 장관, 3~5대 국회의원을 거친 뒤였다.대통령으로서 실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내각과 불화했다. 취임 이후 민주당 같은 계파의 정치인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다른 계파에서 임명한 정치인 장면이 1960년 8월19일 국무총리에 오른다. 이해가 다른 대통령과 총리는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터지고 권한을 잃었다. 1962년 3월24일 하야했다.퇴임 이후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5대 대통령 선거(1963년)에서 박정희 후보와 붙어 2위로 낙선했다. 15만6026표 차이였다. 득표수 기준으로 역대 대선 최소 차이다. 6대 대통령 선거(1967년)에서도 직전과 같은 순위를 결과로 받았다. 표 차이는 116만2125표. 7대 대통령 선거(1971년)는 중도 포기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에서 징역 3년의 집행을 5년간 유예하는 형을 선고받았다.1979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고, 1990년 7월18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국립현충원 안장을 거부했다. 자신이 투쟁한 독재 정권의 박정희 대통령과 한데 묻히는 게 싫었다고 한다. 훗날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생전에 재심을 받지 못했다.윤보선 4대 대통령.(사진=대통령 기록관)재력가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1920년대 자비로 영국에서 유학한 것이 대변한다. 당숙 윤치호는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숙부 윤치영은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정치인이다. 집안은 친일 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가문에서 창씨개명을 결의했으나 그는 거부했다.윤보선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62년이 흐른 올해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했다. 두 사람은 집안은 다르지만 같은 성씨를 쓴다. 윤보선의 윤은 해평에, 윤석열의 윤은 파평에 각각 뿌리를 둔다. 다른 듯하지만 연결고리가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꿨고, 윤석열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났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5대 대선에서 15만여표로 낙선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20대 대선에서 24만7077표 차이로 이겼다. 모두 근소한 표 차이가 가른 운명이다.
  • `8월12일` 국민 디자이너 앙드레김, 순백의 세계로[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12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생전 용 무늬를 자수한 옷을 자주 입었다. 2009년 마지막 투어 콘서트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디스 이즈 잇’(This is it)에서도 그 옷을 즐겨 걸쳤다. 한국인 디자이너가 제작한 맞춤복이었다. 잭슨은 이 디자이너가 자신의 전속으로 일하기를 원했다. 디자이너는 “나는 한국의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전속이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생전 일화이다.앙드레김 영정사진.(사진=이데일리DB)앙드레 김은 1935년 9월 경기 고양시에서 출생했다. 한국전쟁은 인생을 바꿨다. 피란을 간 부산에서 디자이너 꿈을 꾼 것이다. 극장에서 본 영화에 나온 배우의 의상에 끌렸다고 한다.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이 시절 앙드레 김을 다루기도 한다. 이후 1961년 국제 복장학원이 문을 열면서 1기생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대한민국 남성 첫 디자이너라는 수식을 달고 의상실을 열었다. 곧이어 열린 반도호텔 패션쇼는 성황을 이뤘다.앙드레 김 패션쇼는 늘 당대 최고 인사가 거쳐 갔다. 전문 모델을 비롯해 연예인, 운동선수도 패션쇼에 오르고자 줄을 섰다. 남녀 모델이 이마를 맞대는 연출은 늘 쇼의 피날레를 장식했다.마이클 잭슨이 입은 앙드레김 의상.(사진=외신)1999년 터진 `옷 로비 사건`은 그가 대중에 친숙하게 다가간 계기였다. 이른바 말하는 `사회지도층`이 고급 의상실을 드나들고, 거기서 고가의 옷이 로비에 쓰였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앙드레 김의 의상이 동원됐다는 것이다.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서는 과정에서 실명 김봉남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옷 로비 사건은 비리 실체를 규명하지 못한 채 끝났다. 밝혀낸 것은 앙드레 김 실명뿐이라는 비아냥이 따랐다.이름에 더해 특이한 언행은 그를 희화화 대상으로 만들었다. 짙은 화장과 검게 칠한 머리카락 그리고 영어와 불어 같은 외국어를 섞어 쓰는 말투까지. 이런 이유에서 한글단체는 그를 우리말 해침꾼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비록 모습이 독특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행실은 모범적이었다. 국세청에서 뽑은 모범 성실납세자에 여러차례 이름을 올렸다. 앞서 옷 로비 사건 증인으로 선 뒤에 언론 인터뷰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2010년 8월15일 앙드레 김을 실은 흰색 운구차량.(사진=이데일리DB)평생 흰색을 고집했다. 흰옷만 입었고 옷장에도 흰옷만 있었다. 흰색 차량을 타고 다녔다. 생전에 자주가던 떡볶이집에서는 그를 위해 흰색 앞치마를 제공했다고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끼고 살았는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2010년 8월12일 별세했다. 그를 실은 운구 차량도 흰색이었다.
  • `8월11일` 대한해협 가른 아시아 물개[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11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상택아, 니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하고 바다거북이하고 헤엄치기 시합하믄 누가. 이길 것 같노.”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2001년) 도입부에는 수영선수 조오련이 언급된다. 등장인물이 유년기 부산 바닷가에서 놀다가 주고받는 대사에서였다. 대답은 “조오련”이었다. 조오련이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과정을 함께 유영해본다. 고 조오련 선수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에 오른 모습.(사진=대한체육회)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손발이 컸다. 수영하기에 좋은 신체 조건이었다. 제대로 수영을 배운 것은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1969년 서울 고모 집으로 무작정 상경해 YMCA 실내수영장을 다녔다. 거기서 독지가의 눈에 들어 도움을 받아 체육 명문 서울 양정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니 천재적인 실력을 금세 드러냈다. 1970년 12월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 전까지 한국신기록 14개를 갈아치웠다.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 만에 거둔 성적이다.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우승해 2관왕을 차지했다. 전부 아시아 신기록이었다.금메달보다 값진 것은 두 차례 모두 일본 선수와 대결에서 거둔 승리였다. 당시 일본이 제패해온 아시아 수영 구도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일본 언론은 고교생 신예 조오련을 두고 `수영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일본 수영왕을 이겼다`고 특필했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국민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의 나이 18세였다.고 조오련 선수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당시 수영 2관왕에 오른 모습.(사진=대한체육회)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자유형 400m와 1500m 금메달을 땄다. 두 대회 연속으로 같은 부분을 석권하는 기록을 썼다.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시아신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사람들은 그를 아시아의 물개라고 불렀다. 1978년 다시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딴 이후 은퇴했다.은퇴 이후 1980년 8월11일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너는 역사적인 시도를 한다. 그날 새벽 0시5분 부산 다대포 반도조선방파제에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최소한의 장비로 떠난 여정이었다. 수경과 스노클만 착용한 그의 뒤를 배 3척에 나눠탄 의료진과 동료가 뒤따랐다. 상어나 어류로부터 공격을 막고자 특수제작한 철제 안전망을 친 게 전부였다. 이제부터 스스로와 싸움이었다. 매시간 영양을 보충하는 과정에서 먹은 빵과 음료수가 소화불량을 일으켰다. 소화제를 먹고서 간신히 컨디션을 회복했다. 디스코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지루함을 견뎠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수 있어서 한시도 몸을 가만둘 수 없었다. 도전을 앞두고 서울에서 전남 해남까지 걸어 지구력과 인내심을 길렀던 게 도움이 됐다.1980년 8월11일 대마도에 도착해 태극기와 동아일보 사기를 번쩍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수영선수 조오련.(사진=동아일보DB)13시간 16분 10초가 걸려 대마도 소자키 등대 땅을 밟았다.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넌 첫 인류의 탄생이었다. 육지에 선 조오련은 “대한 남아의 용기와 기상을 발휘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이후 1982년 영불 사이 도버해협을, 2002년 다시 대한해협을, 2003년 한강 600리를, 2005년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3km를, 2008년 독도 33바퀴를 각각 수영했다.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기념해 재도전을 준비하던 2009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
  • ‘8월10일’ 우장춘 박사 별세…매국노가 낳은 애국자[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 2022.08.1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잡배의 칼에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경복궁 빗장이 쉽게 풀인 데에는 조선인 조력자 역할이 컸다. 대표 인물이 조선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다. 여러 매국 행위는 차치하고, 살해된 명성황후 얼굴을 보고 신원을 확인한 인물로 기록된다. 사변 이듬해 우범선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거기서 부인을 만나 자식까지 뒀으나 말년은 비참했다.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실제로 살해당해 생을 마감했다.우장춘 박사.부친을 여섯 살에 여읜 우범선의 아들은 총명했다. 1898년 일본에서 나고자라 1916년 도쿄제국대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학적부에 올린 그의 이름은 우장춘. 훗날 해방 이후 대한민국 농업의 토대를 닦은 우장춘 박사다.박사는 일찌감치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쿄제국대 박사 학위를 받은 1935년 발표한 논문(Triangle of U)은 그에게 명성을 안겼다. 그럼에도 학계에서 요직이 아닌 한직을 돌았다. 조선인 출신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1937년 기업으로 옮겨가 연구를 이어갔다. 이 와중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항복을 선언했다.해방된 대한민국은 우장춘 박사 귀국을 추진했다. 직면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면 농업 생산량을 끌어올려야 했다. 육종과 육묘를 아는 인재가 필요했다. 우 박사가 적임자였다. 그는 일본의 갖은 회유를 뒤로한 채 1950년 한국 땅을 밟았다. 언젠가는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귀국은 대학 시절 만난 한국인 유학생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친구인 김철수 영향이 컸다. 그로부터 부친의 매국 행적을 접했다. 속죄하려면 조국에 봉사하고 성씨를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일본 국적이면서 조선인으로서 냉대를 받으면서까지 성씨를 바꾸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젊은 시절 우장춘 박사.(사진=농촌진흥청)귀국 첫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입대해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초대 중앙원예기술원장(1953~1957년)과 초대 농사원 원예시험장장(1957~1959년)을 지냈다. 농업 생산량을 끌어올리고자 주력했다. 외국 종자가 한국 환경에서도 잘 자라게 개량하는 데 애썼다. 벼와 감자, 무, 배추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자라났다. 남부와 제주 지역에 감귤 재배를 시도해 지금의 산업 기틀을 닦았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육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씨 없는 수박 얘기를 했던 게 와전된 것으로 풀이된다.한국 생활도 일본에서처럼 쉽지 않았다. 서투른 한국어 탓에 일본인이라는 오해를 샀다. 일본에서는 조선인이라고 차별을 받았는데 마찬가지였다.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도 붙어 다녔다. 일본에 두고 온 모친이 사망했으나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해 출국을 금지했다.1959년 8월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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