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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화가 신학철(82)이 평생 붙잡아온 신념이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그는 늘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현실을 화폭에 옮기며 그들이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을 담아 왔다.
194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신학철은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진학하며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미대 졸업장이 전업화가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경기 화성·안양 등지의 중·고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동시에 작품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1969년 창립해 1975년까지 활동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AG 전’에 참여해 보다 실험적인 성격의 미술을 선보였다.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회화를 벗어나 퍼포먼스나 설치미술 등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신학철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양한 매체와 형식으로 작품을 실험하며 전시에 내보였다.
하지만 신학철은 이 과정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실험미술’이라 불리던 작업들이 일반 대중과 너무 괴리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새로운 양식만을 추구한다면 과연 미술을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고민했다. 그에게 미술은 소수 전문가나 교육받은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성찰은 한 가지 확신으로 이어졌다. 바로 “민중의 삶과 예술은 결코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깨달음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민중미술’로.
“미술은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게 아니야”
1980년대 우리 미술사의 큰 줄기를 이룬 민중미술은 단순한 예술 사조라기보다 민주화 운동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던 사회적 실천이었다. 정치적 통제와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민중미술가들은 예술이 사회적 현실과 단절돼서는 안 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민중미술 안에는 각기 다른 개성과 노선을 지닌 작가들이 존재했다. 어떤 이는 전시장에서 캔버스에 그린 그림을 선보였고, 다른 이는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된 신념이 있었다. 바로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란 믿음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중미술가들은 기존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택했다. 민중이 알아보고 공감할 수 있는 형식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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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민중미술가들은 미술의 사회적 책무를 중요시했다. 현실과 무관하게 예술의 새로운 형식이나 ‘아름다움’만을 우선시하는 작품은 그들에게 무책임한 것으로 여겨졌다. 민중의 삶을 대변하고 그들을 포함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 이것이 민중미술가들이 생각한, 예술가들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책임이었다. 그들의 미술은 곧 사회적 도구였으며 작품의 미학적 아름다움보다 사회적·정치적 ‘메시지 전달’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점에서 민중미술은 이전과는 결을 달리하는, 전혀 새로운 미술이었다.
추상화·실험미술이 담아내지 못한 삶 기록
이 흐름 속에서 신학철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으로 나섰다. 1987년 민족미술협의회 2대 공동대표를 맡아 지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했고, 동시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와 민족미술인협회의 일원으로서 꾸준히 연대했다. 그의 그림은 민중미술의 정신을 고스란히 구현했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급류 속에서 뒤로 밀려난 농민과 노동자가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그들의 굽은 허리와 거친 손은 추상화나 실험미술이 담아내지 못한 삶을 기록했다.
특히 신학철은 역사의 기록에서 철저히 배제된 이들, 이름 없는 민중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화를 많이 그렸다. ‘한국근대사-종합’(1982∼1983)은 그 대표작이다. 공식 기록에 일일이 남지 않는 이들의 얼굴과 몸짓이 신학철의 거대한 그림 속에서 비로소 역사의 주체가 됐다. 권력자 중심으로 기술하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역사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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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통일미술전 출품한 ‘모내기’로 구속되기도
때로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권력과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제2회 통일미술전’에 출품한 ‘모내기’(1987)가 그 사례다. 검찰은 작품이 북한의 선전논리를 담고 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작품은 꼬깃꼬깃 접혀 압수당했고 신학철은 구속됐다. 이후 그는 징역 10개월의 선고유예를 받으며 3개월간 구치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예술이 곧 사회적 발언이던 시대, 이 사건은 예술과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대표적인 경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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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신학철의 붓끝은 언제나 권력자가 아닌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신념을 기록해 왔다. 그 오랜 궤적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지난 역사이기만 할까. “민중미술은 지나간 시대의 구호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되새겨야 할 질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누구나 광장에 나가 정치적 견해를 자유로이 표출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산다. 민중보다 ‘대중’이나 ‘시민’이란 단어가 익숙한 시대다. 하지만 신학철의 그림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과연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그의 바람처럼 진정 ‘할미꽃’들일까.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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